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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국생명과학 발전연구회'의 참신한 시도에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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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op 작성일2002-09-19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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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합리주의적이고 과학적인 문화 창달에 앞장서야 할 과학기술계가, 일각에서 학연, 지연에 따라 파벌을 조성하며 연구과제 결정에 관여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데에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젊은 이공인들이 이러한 기성세대들의 행태에 분명한 선을 긋고 새로운 풍토조성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 과학기술 장래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은 '한국생명과학 발전연구회'의 참신한 시도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좋은 결실이 있기를 기대 해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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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붉은악마식 과학 개혁 해낼 것"

`한국생명과학 발전연구회` 박홍석 박사

파벌주의 타파…과학계에 새바람 기대

일본서 촉망받던 인간지놈 연구 권위자

지난 16일 대전에서 `21세기 한국 생명과학 발전 연구회`(bio21.kribb.re.kr)가 출범했다.

이 연구회는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다. 벌써 1백7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했다. 생명과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공무원.학생 등 인적 구성도 다양하다. 특히 이들은 `생명과학계의 붉은 악마`가 돼 이 땅의 과학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켜 보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인다.

이 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박홍석(朴洪石.41) 박사.

"과거 우리 축구계에는 특정 대학 출신이 아니면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나돌았죠. 하지만 월드컵에선 달랐습니다. 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했고, 결국 4강 신화를 이뤘습니다. 히딩크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똘똘 뭉친 붉은 악마들의 힘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 순수해야 할 생명과학계에는 학연.지연이 여전히 판치고 있습니다. 젊은 의사.교수.연구원 등 여덟명이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새벽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다 의기투합했습니다."

과학 연구과제 등을 결정할 때 아직도 파벌의 힘이 상당히 작용한다고 朴박사는 지적했다. 그는 "아이디어의 중요성과 참신성을 뒷전으로 미는 행위는 과학 발전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朴박사 등 여덟명은 처음엔 울분을 토하고 서로 위로하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러다 생명과학을 사랑하는 `붉은 악마`같은 조직을 만들어 개혁 운동을 펴보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지난 6월 연구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회원 가입을 받았다. 희망자가 뜻밖에 많았다. 한 회원은 홍보대사로 나서겠다며 15일 부산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연구회의 이름을 가슴에 달고 뛰었다.

"과학계가 어떻고 어떻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자는 게 아닙니다. 생명과학을 사랑하는 붉은 악마들을 만들어 과학계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연구회원들은 ▶학교나 과학동호회 등이 마련하는 대중과학 강연에 자원봉사 강사로 적극 활동하고 ▶생명과학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어 정책 대안을 모색하며 ▶해외 석학이 참석하는 국제 학술대회를 열어 전공 대학생들에게 학식을 넓힐 기회를 주기로 했다. 생명과학의 수준을 높이고 저변을 넓히면 `붉은 악마`들이 하나 둘 모여들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들은 첫 발을 내디뎠다. 충북 청주에서 열리는 `오송 국제바이오엑스포`에 맞춰 26~27일 엑스포장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열기로 한 것이다. 여기엔 데이비드 콕스 미국 스탠퍼드대 지놈연구소장 등 해외 석학 열두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朴박사는 심포지엄을 준비하느라 최근 일주일 내내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는 일본 교토(京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 귀국했다. 당시 국내에선 사람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밝히는 `국제 휴먼지놈 프로젝트`에 우리나라가 참여해야 하는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생명과학계가 파벌로 나뉘어 싸우고 있더군요. 자신의 파(派)가 주도권을 쥐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97년까지 티격태격했습니다. 휴먼지놈 프로젝트 참여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국회가 마련한 공청회에서까지 싸우더니 결국 참여 자체가 물거품이 됐습니다."

朴박사는 "그런 파벌주의에 환멸을 느낀 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당시 한국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朴박사는 일본 국립유전과학연구소에 일자리를 쉽게 구했다. 하지만 떠나면서 펑펑 울었다.

"95년 귀국할 때는 일본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학 시절 일본의 젊은이들한테서 서러움 비슷한 것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놓고서도 그들은 `너희들이 힘 없으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데, 왜 우리를 탓하느냐`는 식이었죠."

하지만 그는 국내 과학계의 파벌 싸움 때문에 97년 일본으로 되돌아 가면서 일기장에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썼다. 朴박사는 일본에서 `잘 나가는` 과학자였다.

국제 인간지놈 프로젝트의 일본 측 연구 책임자 중 한명으로 이화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연구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연봉은 동급 연구원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집을 갖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도쿄(東京)시내에 그는 번듯한 정원이 딸린 집을 마련했다.

"정말 일본에 눌러앉을 생각으로 두 아들이 있는데도 99년에 늦둥이 딸을 낳았습니다. 형제라도 많아야 덜 외로울 테니까요."

2000년 여름, 그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생겼다. 반도체 장비회사인 ㈜디아이의 고(故) 박기억 회장을 만난 것이다. 朴회장은 인간지놈 프로젝트를 이끄는 한국 생명과학자가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는 사람을 보내 "朴박사와 한국에서 잠깐 만나고 싶다"고 했다.

朴회장은 만남의 자리에서 "나도 평양의전 출신이며, 한국 과학계의 병폐를 잘 알고 있다"며 "나는 못했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들어와 바로잡아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朴박사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르신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의 역사 의식이 일본화하고 있어 다시 귀국했습니다. 물론 목표는 과학계를 바로 세워 보자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귀국한 것이 꼭 2년 전인 2000년 9월 18일이었다.

"생명공학연구원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지만, 생명과학계에는 곳곳에 벽이 있더군요."

젊은 과학자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로 어떤 연구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면 "어디서 튀느냐"는 식으로 압력을 가해 끝내 연구를 못하게 하는 일을 그는 수차례 목격했다.

그때마다 朴박사는 의기소침해 있는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했다. 때로는 스스로 나서 압력에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朴박사는 "나는 붉은 악마를 모으는 사람일 뿐 히딩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과학계의 이단아가 아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평범한 진리를 실현코자 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적절한 사람을 연구회장으로 모시겠다고 지난 16일 출범식에서 선언했다.

"핵심 멤버 여덟명이 모이면 늘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옳은 길을 가고 있고, 옳은 것은 항상 이긴다고요. 생명과학계의 변화를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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