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위기’ 젊은 연구원 생각은 [04.03.08/한겨레신문] >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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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위기’ 젊은 연구원 생각은 [04.03.08/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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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작성일2004-03-0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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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를 살리자는 사회적인 공감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정부는 이공계 진학률을 높이고 이공계인의 사회적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며 언론도 한국이 살 길은 과학기술이라며 야단법석이다. 이에 대한 이공계의 젊은 연구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테마대담’은 연세대 ‘물리 및 응용물리 사업단’의 이종필(33) 연구원과 서울대 공학연구소의 박상욱(32·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연구원을 초청해 얘기를 나눴다. 박씨는 2002년 1월 <인터넷 한겨레>에 ‘고사 위기의 기초학문 살리는 법 글러 먹었다’를 띄워 이공계 위기에 관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이씨는 지난 2월 ‘이공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제언’이라는 글을 실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 박상욱/서울대 ‘공학연구소’연구원    “비정규직에 신음 존재 의의 찾기 힘들어”
* 이종필/연세대 ‘물리…사업단’연구원    “제대로 연구할 여건 가장 목마르다”

3월1일 두 사람은 이공계 위기가 불거진 원인에 대한 진단으로 말문을 열었다. 서로 비슷할 것 같았지만 대담이 진행될수록 이공계의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학기술인의 대응을 둘러싸고는 차이를 보였다. 이종필=이공계 문제가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요즘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는데 특별한 시기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에서 학부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고, 그런 맥락으로만 저는 이해하고 있는데, 이렇게 폭발한 배경을 어떻게 보세요 박상욱=학부제와 무관하게, 거품의 붕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소득 100달러에서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 초고속으로 뻥튀기식 성장을 하며 과학기술자를 굉장히 많이 만들었습니다.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많이 만든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이들을 활용해 2만달러로 가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주저앉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거죠. 결코 생겨서는 안 되는 일이 생긴겁니다.

이 = 국가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인 학문진흥책이나 학자 우대정책을 편 적이 없었죠.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는 과학기술자를 양산하는 데는 관심이 많았지, 학문의 기본을 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양적 팽창을 하면서 어느 정도 기초학문을 하는 사람이 생겨났지만 국가에서 방치하다시피 했고, 30년 넘는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기초에 대한 인식이 없었죠. 결정타는 대학에서의 학부제이고, 90년대 초반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됐는데 별로 주목하지 않았죠. 그런 것들이 연결되는 것 같아요.

박 = 기초가 없이 ‘즉시 전력’을 양산했다는 거죠. 기초과학이라고 하면 학문만을 위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공장으로 아직 가지 않았다뿐이지 가까운 미래에 가장 큰 돈이 될 수 있는 분야가 사실은 기초과학입니다. 생명과학(BT)은 생물학, 나노기술(NT)은 물리·화학 그 자체죠. 그동안 우리 나라는 단기간 고속성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정된 자원을 특정 몇몇 분야, 그것도 투자한 지 몇 년 만에 성과가 나올 수 있는 분야에 집중했죠. 인력구조에서 중간층 엔지니어가 너무 많이 양성되고, 천재적인 생각으로 새 분야를 키우거나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거나 극소수만 길러냈습니다. 그나마도 국내 상황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 있는 상태죠.

이 = 박정희식 개발독재, 고속·압축 성장의 한계가 1만달러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나아가려면 한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바꿔야죠. 한계가 경제적으로 드러난 게 구제금융사태라면 학문 또는 지식의 영역에서 드러난 것이 이공계 위기라든지 이전의 인문학의 위기라고 봅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의 근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인재 양성이 국가의 중대사 가운데 하나인데 계속 빠져 있었다는 겁니다.

박 = 기초는 튼튼한데 발전이 더디다고 평가받는 중국, 인도, 러시아의 예도 있죠.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는 고속성장이었고 그에 걸맞은 인재정책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2만달러로 가려면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적용돼야 하죠.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양적으로 두 배 팽창하거나 부가가치를 두 배 늘려야 합니다. 선진국처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야죠.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공계 위기를 빨리 극복해서 고통 받는 젊은 이공계 인력을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 1만달러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인재양성 정책이 과연 성공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세계 13위 경제국이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정당화돼서는 안 되죠. 지금 대통령도 소득 2만달러를 말하는데, 경제 수치적인 목표를 위해 사회가 동원체제가 돼 빨리 달성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판단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인재 양성, 학문을 강조할 때는 적어도 경제논리와는 상관 없는 영역의 존재를 사회와 국가가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공계인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이공계 출신들이 ‘반도체도 만들고 위성도 만들고 해서 이 정도 먹여 살리지 않았느냐’고 얘기하는데 공부하고 연구하는 결과가 단지 돈을 얼마나 버는 문제는 아닌 것 같거든요.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기준이 아니라 학문의 독자적인 존재 의의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경제발전에 이공계가 큰 구실을 했고 또 하고 있으니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이공계인들의 주장을 놓고 의견을 나누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박=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학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공계에 학자와 연구원만 있는 것은 아니죠. 이공계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 분들의 대다수가 그 원인으로 사회경제적 처우를 꼽습니다. 저는 이공계인들의 행복감이 저하됐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경제적 처우의 문제도 있고, 보람이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하는 것도 행복감을 저하시킨다고 봅니다. 사회경제적 처우에 대한 불만은 자신들이 기여하는 바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해요. 이공계 위기의 심리적 기저에 불만감, 행복감의 저하가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과 떼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초학문을 하는 분들도 사회의 일원이고 세금으로 연구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크게는 인류, 작게는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내 연구가 공유돼 어떤 가치를 갖게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하는 학문은 숭고하다는 쪽으로 가면 학문 우월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 = 제 우려는 ‘이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벌어다 줄 것인가’로 등급이 매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연구를 할 수가 없거든요. 훌륭한 성과가 나올 수도 없어요. 연구의 본질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나 성과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돼야 아이디어가 나오죠.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는 사람들까지 경제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걱정됩니다. 행복감의 저하에 공감하는 데, 경제적 처우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 처우를 강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을 가져요. 이공계 위기에 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발언권이 있는 공대 엔지니어 중심으로,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큰 분들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된 것인데, 이공계 전체는 아닐 수 있다는 거죠. 기초학문에 있는 분들은 훨씬 더 열악한 처지에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처우 개선의 문제로 가면 집단이기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박 = 이공계 문제가 쟁점화되기 시작했을 때는 경제적 처우 문제가 부각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하지만 적어도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그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앞으로 우리는 실용학문은 선택과 집중을 하고, 기초학문은 다양성과 연구개발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원화해서 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공계 위기에 관한 논의를 공대 출신들이 주도하는 면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공계중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같은 배를 탔고, 기초학문이 조금 더 안 좋은 상황이고 공대가 그나마 낫다고 해도 이공계라는 이름으로 함께 가야만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 당연히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함께 가야 하는데 지금 논의되고 있는 과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져요. ‘우리가 경제 발전에 이만큼 기여를 했는데 왜 대우는 이 모양이냐’고 하면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도 스펙트럼이 나뉘어지거든요. 처우 개선은 어떤 결과로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에 매달리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가령 회사의 사장이나 임원진의 생각이 바뀌어서 이공계가 회사도 먹여 살리고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니까 월급도 올려주고 정년도 보장해 줄게, 이것은 불가능하죠. 구조적으로 풀어야 하는 거고,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겁니다.

박 = 이공계 위기 해결을 위한 여러 주장과 움직임 속에서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많으니 정당한 보상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그 논리에 다른 사람들이 수긍하기 때문입니다. 논의의 시발점으로 경제적 기여를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구조적으로 풀자는 것도 맞아요.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바꾼다거나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에 이공계가 참여하는 구조를 만든다거나 해서 과학기술인이 중심부에 갈 수 있는 방향이 설정돼야 한다는 거죠. 두 사람의 토론은 전공과는 무관하게 인문학의 위기로 옮아갔다. 이공계 문제를 학문의 위기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씨는 인문학적 토양의 척박함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지적했고, 박씨는 이공계의 위기가 더 심각한 문제라며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이공계라고 하면 어떤 형태로는 연구와 관련되는데 중요한 것은 월급보다 - 지금은 절대적인 액수가 낮아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으니까 물론 중요하죠 -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가장 목말라 하는 것이 ‘제대로 연구를 좀 해보자’는 거예요. 그런 여건이 만들어지면 행복감의 저하가 어느 정도 상쇄되지 않을까 해요. 또 하나는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소득 2만달러, 3만달러는 아니라는 거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데 사회가 동의하거나 치열하게 토론한 결과도 없어요. 경제적인 수치가 쉽게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리는 것은 비극이죠. 그래서 인문학의 중요성에 절감합니다. 이런 논의들이 없고, 이공계인들도 사회가 지향할 가치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죠. 인문학 토양이 너무 척박하고,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박 = 이공계를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국한시키는 것 같은데요, 연구개발 분야의 고급인력이 줄어드는 게 이공계 위기가 아니고 현재 이공계 위기는 절대적인 숫자로서 이공계 진학률 감소, 고급인력의 이공계

진학 기피,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분들도 이공계로 봐야 합니다. 이공계 위기에 전 국민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미래의 산업역군, 부가가치를 만들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공계의 위기가 진정한 위기로 느껴지고,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와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조금 어렵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진로 선택에서도 인문사회계보다 훨씬 못하다고 여기는 게 이공계이고, 그것만 봐도 이공계 위기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 = 합리적인 성장,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기초가 중요하죠.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문학이 책 파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기름칠을 하고 기계를 조이는 사람들의 일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지 않느냐, 결국은 사회 전반의 인문학적 성숙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보거든요. 또 앞으로는 기초학문은 국가의 생존과 관련돼 있어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이지요. 얼마 전에 보도된 미국 국방부 보고서를 보면 20년 뒤에 기후 문제가 절박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기상전문가가 없어요. 연구개발이건 아니건 분야별 전문가가 너무 없어요. 이 분들이 탄탄하게 받쳐야 학생들도 미래를 그릴 수 있죠. 이들을 키우고 자기 역할을 하는 구조를 만들면 어느 정도는 이공계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거든요.

박 = 분야별 전문가를 지금까지 못 키워낸 것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국가 성장전략 때문이라고 보는데 다양한 전문가의 확보는 국가의 연구 규모, 학문의 저변에 의존한다고 봅니다. 그런 기반이 안 되어 있었죠. 이제부터는 그나마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 이공계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는데 그들이 이공계인의 다수는 아닐 겁니다. 극히 소수의 전문가들일텐테, 그것이 전체 이공계 위기의 해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공계 위기를 해결하는 정부 대책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신랄했다. 이=전문가가 태부족인 건 현실이에요. 제가 조사해 보니 저희 분야(고에너지 물리학)만 해도 미국 스탠퍼드 대학 검색엔진에 등록된 연구자 수가 인구 10만명 당 0.3명 정도거든요. 미국 2.9명, 일본 2.4명에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물론 우리와 경제규모가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나 스페인의 0.9명 정도에도 한참 모자라요. 다른 분야도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전문가 양성을 고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사람들이 있어야 후배들을 끌어올 수가 있고, 여러 사람을 묶어 낼 수 있다는 거죠. 이공계 출신들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고, 국가 생존에 관련된 큰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비전을 보여주는 것 즉 물리학자로서도 저렇게 될 수 있다, 수의학을 하면 황우석 교수처럼 될 수 있다는 전망을 보여주는 것도 이공계 위기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박 = ‘역할 모델’을 말씀하셨는데 청소년들이 이공계 진학을 주저하는 이유가 저는 확률의 문제, 공포심의 문제라고 봅니다. 빌 게이츠, 이런 사람 얘기를 하면서 이공계에 가라고 하면 약발이 안 먹힙니다. 몇 만명 중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그런 길을 왜 가느냐, 진짜 영악하죠. 의대나 한의대를 가서 윤택한 생활을 오랫동안 누리는 것을 택합니다. 아이엠에프가 가져온 커다란 가치관의 변화죠. 특출난 사람만이 아닌 평범한 이공계인들이 직업에 만족할 때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정부가 2002년 7월부터 대책을 내놨는데, 한마디로 ‘대증요법’이죠. 고교생들을 어떻게 하면 이공계에 집어 넣을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분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해서 그것을 본 후배들이 이공계에 가도록 꼬드겨볼까 하는 겁니다. 타깃이 고등학생과 원로입니다. 현장의 젊은 과학기술인을 위한 정책이 없어요. 위기의 핵심은 20년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고, 열악한 환경과 비정규직에 시달려서 그 여파가 대학생, 고등학생으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이 = 예를 들면, 우리 분야만 하더라도 학위를 받고 나서 교수되려면 평균 10년 걸려요. 박사 학위 받고 10년 동안 그렇게 있다는 것은 인력 낭비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든 줘야 합니다. 연구소를 짓든지 교수직을 늘리든지,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예요.

박 = 장학금을 준다고 하는데, 10년 후의 자기 모습을 보고 진로를 정하지 장학금 보고 진로를 정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득권층으로서 과학기술계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는 분을 위해 묘역을 만드니 정년을 늘리니 하는데 비정규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한테는 그림의 떡입니다. 젊은이를 채용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채용 구조 합리화죠. 대부분 70년대 초에 만들어진 정부 출연 연구소는 과감하게 체질을 바꾸고, 현 시대에 맞게 통폐합 또는 신설하고, 임금피크제 도입, 비정규직 해소를 통해 젊은 사람을 위한 자리를 내야 합니다. 둘째는 활용이 안 되는 고급 인력을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시키는 데 정부가 나서야 하는 겁니다. 고급 인력들이 일을 못하고 있고, 비정규직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비정규직으로 풀려고 해요.

이 = 사람을 키워나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비전이 나와야 하는 것인데 그게 없어요. 언론도 이공계의 저변을 넓히는 것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재 한명을 기다리는 쪽이죠. 예를 들어, 서울대 수석 졸업한 학생이 군대에 갔다고 신문에서 사설을 썼는데, 나중에 몇 명을 먹여 살릴지 모르는데 사병으로 군대에 보내느냐고, 그러면서 아무 관계도 없는 평준화 폐지를 말해요. 보통 사람이 어떻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이냐, 저변이 있어야 천재가 나오거든요. 정부도 하늘만 쳐다보고…. 정부가 나서서 이공계의 선택의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봐요. 고위공직자 할당도 한 방법이지만 제한적이죠. 대학 졸업자가 획일화된 방식으로 취직하고, 사는 게 강요되고 있죠. 정부가 일을 많이 만들어 먹여 살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문가들도 자연스럽게 육성되죠.

박 = 과학기술인들이 스스로의 영역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과학기술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만 역은 쉽죠. 비과학기술인들과의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정도입니다. 과학기술 마인드를 가지고 진출할 분야가 많습니다. 공직은 물론 금융, 미국 월가에는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진출해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은 문화원에 과학기술자가 한 명씩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공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길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에요. 이공계 내에서는 다른 분야로 진출한 과학기술인을 낙오자인양 경원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지양돼야 합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과학기술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널리 퍼져야 합니다.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주제로 옮아가면서 다시 의견 차이가 불거졌다. 과학기술자들이 이익집단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직은 이를 우려할 단계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이공계인 스스로 자기 변신해야할 부분이 많다고 봐요. 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이 핍박을 하는데, 무식한 공돌이라고. 사회 돌아가는 것을 알아 역사나 철학을 알아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거죠. 저는 이런 비유를 하는데, 자동차를 정비하는 것과 운전하는 것은 별개라는 겁니다. 정비하는 사람이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운전을 잘 한다는 보장은 없죠. 그런 면에서 다른 영역과 인터페이스를 잘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이공계인이 이익집단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과학기술단체총연합에서 총선을 맞아 비례대표 30%를 과학기술인에 할당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정치개혁 문제는 비례대표 자체를 늘리는 것이어서, 그것을 먼저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회적 안목이 없으면 책임 있는 위치에 가서도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몫을 챙겨야 할 부분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회의 고급 지식을 독점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사회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박 = 인문학 하시는 분들이 이공계를 무식하다고 하는데 그 역도 가능하죠. 예를 들어 그 분들이 화학에서의 ‘몰’ 개념이나 고전 역학의 공식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무식하다는 비난이 억울하지만 과학기술인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게 차라리 쉬우니 양보해야죠. 이익집단, 권력화, 지식인으로서 굉장히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지금까지 과학기술인들이 사회 전반에서 소외당했고, 운전대를 잡아 볼 기회도 안 줬죠. 억눌렸던 게 지금에서야 조금씩 표출되고 있어 아직 경계하는 것은 이르다고 봅니다. 과학기술인들의 행복은 자유로운 연구에서 나옵니다. 권력 준다고 기뻐할 사람은 없죠. 오히려 지금은 국회에도 들어가고, 그런 것을 독려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 아직까지 운전대 근처에도 못 갔다는 말이 맞아요. 이익집단이나 권력화한다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부안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문제를 보면서, 서울대 교수들이 서울대에 방폐장을 유치하자고 성명을 냈는데, 사회적 짐을 떠안겠다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신중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분들의 말투는 부안 주민들이 과학을 잘 몰라서 괜히 무서워한다는 식이었죠. ‘너네는 과학을 모른다’는 게 깔려 있어요. 이게 권력화의 단초죠. 서울대 그 분들이 부안사태가 나기 전에 얼마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느냐고 묻고 싶어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의 대다수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런 모습은 없었죠.

박 =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과학 쇼를 하고 쉽게 과학을 가르치고 과학 문화를 전파하는 것만이 대중화가 아닙니다. 또 대중의 과학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이해해라’나 마찬가지죠. 과학 대중화는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적 쟁점이 있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사안에 대해 과학기술 지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서울대 성명은 너무 감정적이죠. ‘차라리 내가 할께’ 그것 아닙니까. 부안 문제, 새만금 문제도 그렇고, 자신 있게 나서서 과학적으로 평가해 보겠다는 과학기술자 단체가 한 곳도 없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사회적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곳이 있죠.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자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 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이고 대중화라고 봅니다.

정리 황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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