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과학, 아직도 망할 게 남았나?

우석훈 | 2.1 연구소 소장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일관되게 나빠진 분야들이 몇 개 있다. 사교육이 그렇고, 농업이 그렇고, 지하경제가 그렇다. 민주화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기대가 제일 충족된 곳은 아마 인권 분야일 것이다. 하지만 정책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민주화되어도 별 볼일 없는 분야들이 있다. 인권은 확실히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좋아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시기가 겹쳐서 크게 힘을 못 쓴 이유도 있고, 80~90년대 민주화 시절에 너무 큰 얘기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제일 망한 걸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과학을 꼽을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제일 큰 타격을 받은 데가 과학 분야이고, 여러 부처로 찢겨서 아예 흔적도 없게 됐다. 현장에서 죽는 소리를 하니까 과학기술위원회가 결국 상임위원회로 새로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는 것 같다. 시민단체가 유독 약한 분야가 농업과 과학이다. 그나마 농업은 민중단체 계열의 전농 등 생산자 단체가 버티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 등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형상을 갖춰가기 때문에 길게 보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과학은? 시민단체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과학기술자노조가 엄청나게 힘을 쓰는 구조도 아니다.

원래는 WTO의 최대 수혜자가 과학 분야가 될 거라고 20세기 후반에 모두가 예상을 했었다. 수출 보조금이 없어지면서 공공기술개발에 대한 보조금 형식으로 기업 보조금이 바뀔 거니까, 과학 분야는 아주 잘될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한때 나오던 ‘이공계 살리기’ 목소리도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가 합격선이 최고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지방까지 의예과 계열이 다 차고 나야 비로소 이공계 지망이 시작된다. 냉정하지만, 그것만큼 이 시대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지 않은가?

지역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점점 더 지역이 스포츠 쇼비니즘으로 질주하는 것과 똑같다. 과학도 ‘보여주기’와 쇼비니즘에 기대면서, 황우석 이후로 여전히 ‘한탕’을 통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노린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벨상은 그렇게 단기간에 돈을 퍼붓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좀 나왔는데, 이 사람들에게 과학정책을 맡겼다. 대중적 인기가 너무 높아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는데, 행정가의 몫이 별도로 있는 거라서 결국에는 엉망이 되었다는 게 일본 과학자들의 전언이다.

기초과학과 기초 엔지니어링이 약하게 되니까 벌어지는 문제가 각 산업의 자체 고도화 즉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다. 기초 소재, 정밀기계, 스위스 등 유럽의 소규모 경제 국가들이 떼돈 버는 분야에서 우리는 유독 약하다. 결국 이게 중소기업 혹은 가족기업의 영역인데, 여기가 약하니까 지역경제도 어렵고 고용 문제도 풀기가 어렵다. 문제는 알겠는데, 여기에 조금 집중하자고 강조하면, 과학계는 또 금방 수출 쇼비니즘으로 간다는 게 솔직히 딜레마다. 황우석 때, 지겹게 보았다. 왜 한국의 유명한 과학자는 전부 보수이고, 쇼비니스트들인가?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사람도 많지만, 언론의 틀을 거치고 나면 전부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 돌변한다. 현장에서 보면, 그냥 미국 시민권 가지고 싶은 소박한 찬미주의자들이 더 많다.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과학기술 분야는 아무래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안상수가 대통령 되면 좀 나아질까? 그도 중소기업 살리자는 얘기 외에는 특별히 더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과학기술 분야를 생태계로 보고 분석을 해보면, 전형적인 상후하박 구조이다. 위로 가면 넉넉하고 지낼 만하지만, 밑으로 가면 인권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비민주적 실험실 운영과 거의 노예 같은 대학원 연구조교들의 삶… 쇼비즈니스와 특성이 너무 똑같다. 나한테 한 가지만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우선적으로 지방 이공계부터 무상 등록금을 구현하겠다. 서울에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험실도 있는 게 아니니, 그 편이 더 효율적이다. 그리고 그 돈을 따라 실험실 민주화에 대한 고민을 할 것 같다. 과학자의 꿈을 가져야 할 청년들이 편의점 알바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 이게 현실이다. 민주화의 성과가 왜 과학기술계에는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왜 유독 과학 분야에서만 시민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는가? 그런 고민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 드디어 물리학과가 한국에서 사라지는 날을 볼지도 모른다. 아직도 더 망할 게 남았는가?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