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홀대하는 한국]“벤츠 타고온 의사동창… 이공계는 지하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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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감… 고용불안… 열악한 환경… 과학기술계의 한숨

지방 과학고와 연세대 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전자계열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이모 씨(41)는 고교 동창회를 갈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1990년대만 해도 의대보다 커트라인이 높은 이공계 학과가 많았고, 공부 좀 한다고 하는 학생들이 이공대에 많이 갔다. 이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 동창회를 하면 이런 친구들은 지하철을 타고 와서 명예퇴직 걱정을 하고, 당시 지방의 의대나 치대를 간 친구들은 대형 승용차를 몰고 와서 술값을 낸다.

정부와 과학기술계는 수십 년째 과학기술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은 여전하다. 이공계 출신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거나 업무에 비해 소득이 적다는 등의 이유로 학생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 이공계 종사자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고용 불안에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과학기술 인력 양성을 주도할 컨트롤타워가 없고, 이공계로 우수 인력을 유인할 획기적인 정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한숨만 느는 이공계 종사자들

정부가 이공계 기피 현상을 진단하기 위해 2011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위탁해 관련자들의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이공계에 더 오래 몸담을수록 기피 정도가 심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공계 기피 정도를 5점 척도로 측정한 결과 과학·영재고 학생들은 3.09점, 이공계 대학생들은 3.25점, 대학원생은 3.63점, 현직 종사자들은 3.79점으로 점점 높아졌다. 현직 종사자들의 기피 이유를 들어보면 이공계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일에 비해 수입이 적고 사회적 지위와 직업 안정성이 낮아 힘들다고 호소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이과를 선택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과학계 우수 인재로 키워야 할 수학·과학올림피아드 수상자들도 40% 이상이 의대로 간다.

이공계 대학생들은 쉽게 자퇴를 하거나 다른 길을 택하기 일쑤다. 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전국 4년제 대학의 자퇴 실태(2009∼2011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매년 2만 명가량의 이공계 학생이 자퇴를 하며, 국공립대학의 전체 자퇴생 가운데 이공계 자퇴생이 66%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공대에 비해 취업시장이 좁은 자연대는 의학전문대학원이나 약대를 다시 가기 위한 입시 기관으로 전락했다.

약대 진학 준비로 휴학 중인 경희대 생물학과 4학년 형유진 씨(24)는 “2학년 때 보니 정원 60명 가운데 14명만 등록을 했고, 군대 간 5명을 빼면 나머지는 의·치의학 전문대학원 학원에 다니느라 학교를 안 나오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최중길 연세대 화학과 교수는 “의전원 등의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인력과 학생 수급 체계가 무너졌다. 과거에 비해 정부 지원 예산이 늘었는데도 이공계 인력의 대우는 좋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 정부가 이공계 지원 주도해야

이공계 기피가 심화되는 배경에는 이공계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의지와 정책이 부실한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이상민 의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3년 기준 50개 정부 부처 고위 공무원 1244명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129명으로 10.4%에 불과하다. 연구예산을 편성하는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18개 부처는 이공계 출신 고위 공무원이 한 명도 없었다.

정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공계 인사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으니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소할 정책이나 예산이 적극적으로 편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불만이다. 일본의 경우 고위 공무원의 이공계와 비이공계 출신 비율이 비슷하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이공계 기피 현상을 걷어내려면 과학기술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도 많다. 특히 업무량에 비해 임금 수준이나 정규직 비율이 낮은 기초과학 분야 종사자들을 위해 정부가 정년 보장 및 연금 확대 같은 생활 밀착형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 당장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도 비정규직 비율이 50%에 이르는 곳이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연구환경을 제대로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기업의 연구비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연계 분야에서는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장학금 지원 등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이공계 출신자들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도 과제다. 김태달 청운대 컴퓨터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취업이 잘되고 먹거리가 있다면 이공계를 기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공계 출신들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잘 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이공계#과학기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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