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한과 리승기 - 1960년대 북한의 과학기술

글쓴이
최성우
등록일
2004-09-05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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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 : '봉한학설'을 창시한 북한의 의학자 김봉한

사진 아래 : 경락과 산알에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 현미경 사진 및 구조도 (2003. 7. 9 동아일보 기사 중에서)


[과학과 정치(5)]

김봉한과 리승기- 1960년대 북한의 과학기술

최성우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최근 여러 분야에서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이 활기를 띠고 있다. 올해 안으로 경의선 철도가 연결되고 도로가 뚫리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되리라 기대되는데, 과학기술 분야 또한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면서 장래의 통일에도 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과학기술을 잘 이해하는 일 또한 필요한데, 북한의 과학기술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북한 과학자, 김봉한과 리승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물론 최근에는 개혁과 개방 등과 맞물려서 북한의 과학기술 체제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겠지만, 과거에 크게 주목받았던 북한의 과학자 및 그들을 둘러싼 당시 북한의 정치, 경제적 환경 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북한 과학기술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뿐 아니라, 과학기술과 정치, 경제적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주고받은 중요한 일례를 검토함으로써 나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인체의 경락에 관한 ‘봉한학설’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북한의 의학자로서 김봉한이라는 인물이 있다. 북한 당국은 1950년대 이후 전통과학의 계승 및 ‘자력갱생’노선을 추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한의학의 발전과 과학화를 강조하였고, 김봉한의 경락 연구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봉한은 1961년부터 1965년 사이에 전통 한의학에서는 존재가 인정되었으나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던 경락의 실체를 밝히는 논문들을 발표하여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락은 다른 기관이나 조직과는 독립되어 실제로 존재함이 입증되었다고 하였고, 특히 DNA를 함유한 ‘산알’이라는 아주 작은 입자들에 의해 경락 체계가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김봉한의 주장이 초기에는 전문적 학자들보다는 당의 간부나 과학계의 정치적 인사들에 의해 주목을 받는 등, 북한에서 봉한학설이 크게 부상하게 된 이면에는 과학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우선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후 봉한학설은 전자현미경과 같은 첨단 장비와 실험을 통하여 갈수록 방대하고 대담한 주장을 담게 되었고, 북한 당국은 그의 논문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배포하고 널리 알렸다.

북한에서 봉한학설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널리 인정받은 다윈의 진화론이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이론에 버금갈 정도의 생물학사상 혁명적인 업적으로 간주되었고,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봉한학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널리 선전되는 등, 과학 외적으로도 북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봉한학설은 1960년대 후반 이후로 북한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그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봉한의 연구를 지원했던 정치적 실력자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숙청되는 등, 봉한학설의 몰락 역시 정치적인 이유가 컸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최근 서울대 한의학물리연구실 등에서는 40년 가까이 명맥이 끊겼던 봉한학설을 재현하는 듯한 연구를 진행하여, 이른바 ‘봉한소체’, ‘봉한관’, ‘봉한산알’과 비슷해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였다고 학술지에 발표한 바 있다. 경락의 실체를 완전히 규명한다면, 세포이론 등 기존의 생물학이 상당부분 뒤바뀔지도 모른다고 일부에서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 연구가 앞으로 어떻게 귀결될지 지켜볼 일이다. (아래 링크기사 참조)

리승기 박사는 일제시대 말엽 교토대학에서 새로운 합성섬유, 즉 비날론을 발견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로서, 실용화를 위한 연구도 상당히 이루어놓은 바 있었다. 이후 리승기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북한의 실정에 맞게 생산 공정 및 설비 등을 개량, 설계하여, 북한 자체의 기술과 인력으로 건설된 비날론 공장이 1961년에 완공되었다.

비날론은 합성섬유이면서도 전통 섬유인 무명과 특성이 비슷하여 ‘민족 친화적인’ 섬유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던 석탄과 석회석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자립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던 당시 북한 당국의 정치적 입장과도 크게 부합하여 해외에도 널리 선전되었다.

리승기는 비날론 연구 및 생산 성공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 1회 인민상 과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노력 영웅 칭호까지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김봉한과는 달리 이후로도 오래도록 북한 최고의 과학자로 대우받았다. 또한 그 무렵 북한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성장 등 과학기술자들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는 자체의 자연자원과 원료에 기반하여 사회적 요구와 실정에 맞는 과학 연구를 하는 것이 사회주의 건설과 인민을 위한 과학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러한 자립노선에 부합하는 움직임으로서 무연탄의 가스화 등 석탄화학산업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과학기술이 사상이념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과도하게 좌우됨에 따라, 주력 산업의 하나였던 석탄화학산업의 비경제성 등 여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또한 이후로도 몇몇 분야에서만 기형적인 발전을 보이고 전반적인 과학기술 수준의 낙후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김봉한과 리승기로 대표되는 1960년대 북한의 과학기술 체제는 당시의 대내외적 환경과 사회경제적 요구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옛 소련과 중국에서도 과학기술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춤을 추면서 커다란 혼란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북한의 과학기술 역시 왜곡된 모습을 보이면서 이후 전반적인 발전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 봉한 학설과 관련하여, 8월 말에 다시 최신의 국내 연구 성과가 학회에서 발표된 바 있습니다.
http://sports.hankooki.com/lpage/culture/200408/sp200408310909565881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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