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뉴스메이커] 3월 5일 : 차라리 먹고 살 길 연구.

글쓴이
우경구
등록일
2002-03-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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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차라리 먹고살 길 연구하는 게 더 나아요”
대덕연구단지가 술렁이고 있다. 1만5천9백여 명의 연구원, 116개 연구기관과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는 첨단과학의 메카인 이곳 풍경이 심상치 않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을 바라보는 이곳 연구원들의 심경은 우울하다 못해 참담하다.
정부는 지난 2월 8일 대입 수험생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부랴부랴 ‘청소년 이공계 진출 확대를 위한 종합대 책’을 마련했다. 과학장학생 제도시행, 교차지원 억제, 이공계 동일 계열 가산점 부여, 병역특례 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정부가 문제의 핵심은 외면한 채 어 정쩡한 대책으로 얼버무리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만 과학입국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과학기술자들을 내팽개치는 이공계 정책의 이중 성에 연구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제 이공계 지망생이 줄었다 해서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서 서둘러 내놓은 대책들은 한 달이 채 안 돼 이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 졌다. 2월 25일 열린 정부 실무대책회의에서 이전의 이공계 대책을 보다 구체화했다고 하지만 실효성이 의문시되는 응급처방에 불과하 다는 게 중론이다. 위정자들의 이런 행태는 바로 우리의 미래 경쟁력 이 걸려 있는 이공계 정책을 방향도 원칙도 없이 헤매게 하는 결정 적인 요인이다. 대덕의 연구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느니 차라 리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게 낫다”며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있다.

▲4명중 1명 “과학기술계 떠나고 싶어요”

지난 2월 20일, 포근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대덕연구단지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평온하고 조용해 보였지만 이곳에서 만난 연구원들 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먼저 찾아간 한국지질자원연구소의 한 연구 원(49)은 자신들을 ‘보따리장수’에 비유했다.

“정권이나 장관이 바뀔 때마다 연구원들은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좌향좌, 우향우’ 제식훈련을 해야 했다. 한 분야에 십수 년을 몰 두해도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기 어려운데, 갑자기 과제가 없어지고 어떤 것은 새로 생겨서 촌놈 서울나들이 하듯이 방향감각마저 잃어 버리고 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이 멍청이가 돼간다는 느낌이다. 새로운 장관마다 화려한 계획을 발표했다. 김영환 전과기부 장관도 ‘북스타트운동’을 벌였지만 그건 장관 경력 관리를 위한 이벤트였 을 뿐이다. 연구원들도 자신의 처지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 을 의대·상대·법대로 보낸다. 장학금을 주고 교차지원을 억제한다 고 이공계에 학생들이 몰리겠는가.”

그는 “연구원들의 진짜 ‘연구’는 말년이 어떻게 하면 비참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덕에서 19년째 를 보내고 있는 고참연구원이다.

대덕연구단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3년부터 건립을 추진, 현재 8백40만 평의 대지에 정부 출연 연구소 18개, 기업연구소 27개, 투자 기관 10개 등이 입주해 있는 국내 최대의 연구단지다. 첨단과학기술 을 개발해 국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선도한다는 목표 아래 설립됐지 만 연구단지의 위상은 박정권 시대를 정점으로 끝없이 추락해왔다. IMF 구제금융을 거치면서 이곳 연구원의 25%가 해직되었고 남아 있는 연구원들도 신분 불안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과학기술노동조합이 2001년 3월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16개 정부 출연 연구소의 연구원 8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연 구원들의 일반적 정서를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이직을 준비 중인 연구원은 46명으로 전체의 5%, 기회 가 있으면 바로 이직하겠다는 연구원이 393명으로 45%를 차지했다. 이직 생각이 없다는 연구원은 133명으로 15%에 불과했다. 이직 이유 로는 고용불안 및 신분보장 미흡, 연구환경 황폐화가 66%(573명), 급 여수준 및 후생복지 문제가 15%(127명)를 차지했다. 주목할 만한 것 은 전공을 떠나 개인사업을 하고 싶다는 응답이 208명으로 전체 24%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4명 중 1명이 과학기술계를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택시기사 보험사원으로 나서는 연구원도

정부 출연 연구소의 전·현직 연구원을 대상으로 이직 결정 과정을 조사한 김종진 방송대 교수의 논문(<연구인력의 이직결정요인에 대 한 실증적 연구>, 2001. 12)도 비슷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직자 들이 연구소를 떠나게 된 중요한 요인은 외부 스카우트, 구조조정으 로 인한 고용불안, 소장 교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미래의 비전찾기, 개인의 가치관과 조직의 목표 사이의 불일치 등도 이직하 게 된 동기가 됐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경우 IMF 이후 이직자가 급증, 1998년에는 618 명(전체 10.9%), 1999년 436명(7.7%), 2000년 495명(8.3%)이 연구소를 떠났다. 이직자들의 진로는 대학, 기업, 창업순으로 나타났고 취업이 나 이민 등으로 해외에 나간 사람은 1998년 51명, 1999년 30명, 2000 년 48명이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최고의 연구소로 통하는 전자통신연 구원(ETRI)은 이직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벤처열풍과 함께 해마다 200명에서 300명의 연구인력이 연구소를 빠져나갔고 그보다 적은 수 의 연구원이 새로 충원되고 있다. 심각한 것은 이직한 연구원들의 상 당수가 석·박사급, 30대, 5년 미만의 젊은 연구원이라는 점이다.

연구단지 내 주거지역인 전민동의 한식집 송옥. 몇 주 전까지 이곳의 주인은 이해권씨였다. 그는 전자통신연구원에서 15년 동안 근무했던 이학박사.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 국내 기업이나 해외 기업에서 스카 우트 제의를 종종 받았지만 ‘알량한 애국심’ 때문에 꾹 참고 연구 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신분불안이 가중되고 도무지 연구를 할 수 없는 풍토가 계속되자 1999년 연구원를 박차고 나와 이 음식점을 차 렸다. 지금은 미국의 회사에 취업해 한국을 떠났다. 그의 가족들은 “경영이 힘들다고 연구원을 내몰고 부족하다고 다시 뽑는 상황에서 연구원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겠느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덕연구 단지 주변에서는 연구소 출신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한두 군데가 아 니다. 중국집을 하는 경우도 있고 택시기사도 있고 보험사원으로 나 선 연구원도 있다.

연구원들의 불만은 다른 전문직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가장 크다. 정부 출연 연구소는 민간연구소에 비해 5백만원에서 2천만원 가량 적은 급여를 받고 있다(앞쪽 표 참조). 게다가 연금혜택이 없고 그동 안 지급되었던 자녀학자금 보조도 없어졌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남편이 서울대 공대 박사 출신으로 정부 출연 연구소에 근무한다는 여성은 “연봉이 3천만원 조금 넘는다”며 “의사·변호사와는 비교 하고 싶지도 않고 컴퓨터회사 영업사원만큼도 못하다”고 털어놓았 다.

박사급 연구원의 경우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3~4년 등 최소 10여 년을 공부한 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비슷 한 연배에 비해 처우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덕의 박사 연구원들 사이에는 “자식이 이공계에 가겠다고 할 때 가장 두렵 다”는 말이 이제 농담처럼 퍼져 있다.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경우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이들 중 박사후과정(Post-Doc)은 월 1백30만원, 박사과정은 70만원, 석사 과정은 63만원 정도가 평균 급여로 지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곳 연구원들이 급여 수준을 높여달라는 주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통신연구원의 ㅁ연구원(37)은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하 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연구원의 관료적 행정이나 조변석개하는 정부의 과학정책 탓이 크다고 한다.

▲연구 자율성 보장·연구 풍토에도 ‘회의’

연구 여건을 더 열악하게 만든 것은 1996년 도입된 PBS제도(Project Base System). 과제중심운영제도로 불리는 이 제도는 정부 출연 기 관이 고유의 설립목적 이외에 외부에서 돈이 될 만한 과제를 수탁해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당초 연구사업비의 편성·배분·수주 와 관리를 프로젝트 단위로 운영해 연구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취지 로 실시되었으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와 달리 중장기적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국책연구소가 곧바로 상품화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이 돼버렸고, 연구원들은 외 부 과제를 수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영업사원’으로 전락했다. 연구원 1명당 1~2개의 과제를 맡으면 양질의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음 에도 불구하고 10개 이상의 과제를 맡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연구원 은 “10개 이상의 과제를 맡는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얘기”라고 고 백했다. 연구원들을 시장판으로 내몬 이 제도를 입안한 사람은 공교 롭게도 과학기술계 출신인 정근모 전 과기부 장관이다.

지질자원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정부부담 인건비가 수십 % 내외라 서 연구원들이 자기 급여의 2~3배를 벌어야만 연구소가 유지된다. 그 러니 닥치는 대로 연구에 참여하게 되고 연구의 축적 없이 아는 것 만 빼먹다 보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거나 심사숙고할 여력도 없어진다”고 털어놓았다.

대덕연구단지에서 연구원의 수명은 10년이 채 못된다. 40대 초반이면 연구에서 떠나 관리업무를 맡게 된다. 박사까지 10년 이상을 공부했 지만, 정작 써먹는 기간은 10년도 안 되는 것이다. 백발의 연구원이 드물지 않은 외국과는 사정이 딴판인 셈이다. 이러니 연구성과가 축 적되지 않고, 정작 활발하게 연구할 동안에도 ‘미래를 대비한 준 비’를 하기가 어렵다. 안정적인 연구가 이뤄질 토양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이다.

연구단지 내에 위치한 KAIST 재학생들도 정부 출연 연구소의 이런 풍토를 잘 알고 있다. 전자공학 박사 7학기에 다니는 유동형씨는 “가능하면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한 욕심 보다는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산업공학 석사과 정에 다니는 장희정씨도 우리나라의 연구풍토에 대해 회의적이다.

“수십억을 연구에 투자하기보다 정치권에 갖다 바치는 벤처 비리를 보라. 과학기술자들에게 애국심만 바랄 수는 없다. 원천적인 과학연 구를 진행할 수 있는 풍토를 어서 빨리 조성해야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부나 연구소 운영만 탓할 수는 없다. 기계연구소의 한 연구원 은 “연구원들이 생존의 방법을 터득해 안주하고 있다”며 “연구원 들의 의사를 결집해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최근 대덕연구단지에는 십여 년 전 나붙었던 ‘어릴 적 꿈 과학자, 커서보니 처량하다’라는 말이 연구원들 사이에 다시 회자되기 시작 했다. 대덕연구단지는 오랫동안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대 덕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도 암담할 뿐이다.

〈대덕/김재환 기자 j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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