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이순신 장군의죽음 미스테리

글쓴이
고비
등록일
2004-05-0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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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죽음은 현재 3가지 의견이 가장 팽팽합니다. 참고하셔서 보셨으면 하는군요. 참고로 위의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순신역전'이라는 그림입니다. 이순신의 죽는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이죠. 그럼...

이순신장군이 판옥선을 탄 이유는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사를 지휘하려면 거북선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북선에 들어가려면 이순신의 지휘를 받은 다른 장수들이여야 합니다. 물론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에 들어갈 때도 있지만, 거의 장군선을 타서 지휘를 하였습니다. 게다가 판옥선도 약한 배가 아닙니다. 거북선이 판옥선을 조금 개량한 것이기 때문이죠. 밑의 글은 앞에도 말했지만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한 가설입니다. 한번쯤 읽어두셔도 나쁠 것은 없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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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제독의 미스터리 / 박 완

저자와의 대담 석창진님 박 완님 은준용님 이창희님 문형준님 강지영님 박현배님 - 전사(戰死)인가,자살인가,은둔인가

1.서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 번이라도 위인전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임진왜란(정확히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면서 남긴 최후의 유언이라고 알려져 있는 문구인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참혹한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해전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의병과 함께 임진왜란 전체에서의 조선의 (상처뿐인)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으며, 마지막 해전에서 불의의 일격으로 전사할 때까지 장병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마침내 죽은 뒤에도 노량 해전에서의 대승리를 일구어 낸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호칭은 결코 그에게 영웅(英雄)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고 성웅(聖雄)이라는 극존칭에까지 이를 정도이다.

하지만 이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위의 문구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그 분을 포함한 다른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상스러운 말 한 마디는 해야겠다. 씨바 영화 찍나? 지금까지 안으로는 무능한 왕과 조정 대신들, 밖으로는 적군과 맞서 싸우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마지막 해전에서 대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정말 재수 없이' 적탄에 맞았으면서도, 인간적인 원한 섞인 단말마의 비명도 아닌 극히 이성적이며 어찌 보면 '성스러운' 유언을 남긴 뒤에 사망이라. 어찌 보면 한국의 위인전의 지나친 영웅주의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왜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하였는가? 마지막 해전에서 이순신이 갑옷을 입지 않고 지휘하였다는 주장은 또 무엇인가?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의 함대의 지휘를 왜 직속 부하 장수가 아니라 신참인 그의 아들과 조카가 맡았는가? 그리고 왜 이순신은 사망 후 80일이 지난 뒤에야 장례식을 치렀으며, 또 15년 뒤에 묘지를 이장하였는가?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서의 이러한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 이순신의 사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상황이다.

현재 이순신의 사망에 대한 설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이순신은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전사하려 하였다는 '자살설'이다. 두 번째는 당시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친족 및 측근들과의 합의하에 노량 해전에서 몰래 빠져 나와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은둔설'이며, 「유물의 재발견」의 저자인 남천우 씨에 의해 제기되었다. 세 번째는 기존의 '전사설'이며, 이에 대해서도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실정이다.

그 중 내가 이 글을 통해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설에 대한 비판이다. 나 역시 이순신의 죽음에 있어서 후세 사람들의 각색이 상당히 개입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의 진정한 최후의 모습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첫 번째 설은 그러한 의혹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가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와 그 현실성 여부에서 큰 약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유물의 재발견」의 5장 '이순신과 거북선'에서 한 부분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은둔설'을 제기한 남천우 씨의 주장 역시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그렇기에 비록 세 번째 설인 '전사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의심스러운 점이 많지만, 이 비판과 함께 전사설에 입각하여 당시 이순신 제독의 최후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자살설'과 '은둔설'을 제기한 이들이 그 바탕에 깔아 두고 있는 의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짐작해 보고자 한다.


2.본론


(1)'자살설'과 그에 대한 비판


'자살설'이란, 이순신은 노량 해전 당시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사의 형식을 빌어서 자살하기 위해 갑옷마저 벗어 두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종식 뒤 17∼18세기에 걸쳐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논한 바 있으며, 그 중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시의 문구).1)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이민서[1633∼1688]가 김덕령 장군의 전기를 쓴 내용 중).2)


그리고 이런 사료들에 근거하여 노병천 씨는 이순신의 '자살설'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은 사천 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 조끼 '환삼'도 벗어 젖히고,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순신 자살설이다(노병천).3)


이들이 주장하는 이순신의 '자살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히도록 하자. 그보다는 이들의 '자살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주장인가 하는 것을 먼저 문제 삼도록 하겠다. 즉 전사를 가장한 자살을 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성이 있는 주장인가? 남천우 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 주장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다.

'자살설'이 현실성이 부족한 주장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자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죽이고자 하는 의지와, 그리고 그를 실제로 수행하는 행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단지 갑옷을 벗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반드시 그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확실한 행위가 되지 못한다. 즉 반드시 일본 수군의 이름 모를 병졸이 그를 쏘아서 맞춰 준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설령 맞는다고 하여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보장 역시 없는 것이다. 기함 지휘소의 여러 측근들과 튼튼한 방패, 그리고 부하 장수들의 군함으로 둘러싸인 지휘관의 입장에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한다는 행위는 자살 행위 중에서는 극히 졸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약 이순신이 정말 자살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했다면, 그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부하 장수들의 안위와 전체 해전의 승리마저도 도외시한 무책임한 지휘관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기함은 함대의 선두가 아닌 중심에 위치하여,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전체 해전의 상황을 파악하여 지휘를 내려야 하는 극히 중요한 장소이다. 그렇기에 기함이 공격을 받는다면 우선 지휘관과 그 부하 장수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또한 기함에 탑승한 수많은 병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마지막으로 함대에 대한 지휘력 상실로 인해 전체 해전에서의 승리 역시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이민서가 말한 '갑옷을 벗고(免甲)...'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 최두환 씨는, 이것은 진(晉)나라 장수 선진(先軫)의 고사에서 나온 고사구절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즉 '갑옷을 벗고 앞으로 나선다'라는 의미의 '면주선등(免胄先登)'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보다는 '용감하게 앞선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에 근거할 때, 나는 '자살설'은 이순신의 사망에 대한 세 가지 가설 중 가장 현실성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한다.




(2)'은둔설'의 내용과 근거


'은둔설'이란,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친족 및 측근들과 합의하고서 노량 해전 당시에 야음을 틈타서 몰래 빠져 나가 그후 약 16년간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주장이다. 최근 남천우 씨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으로 보이며, 이 주장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료는 많지 않다. 다만 남천우 씨는 이순신이 생전에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는 내용과 그가 남긴 시의 문구 중 일부, 이순신이 '전사'한 뒤의 전장에서의 사후 처리 과정, 그리고 이순신의 장례 절차에 대한 의문점 등을 종합하여 이 가설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의 재발견」에 수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여러 의문점(즉 '은둔설'의 근거)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이순신이 부하 장수인 유형(柳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예로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 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②이순신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시의 전문을 올려 보겠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 때 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③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④『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의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이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을 때에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 그리하여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극히 의심스러운 점이다. 결국 이것은 이분의 기록은 이순신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⑤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묘지가 이장된다. 이것은 이순신이 노량 해전 이후 은둔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새 생활을 정착한 뒤,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3)'은둔설' 비판


위의 근거들을 살펴 볼 때, 적어도 '은둔설'은 '자살설'에 비해 다양한 근거를 통해 보다 현실성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죽음에 있어서 깔려 있는 수많은 의문점들이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5가지 근거로는 이순신의 '은둔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 장에서는 위의 5가지 근거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근거 ①과 ②는 이순신의 '은둔설'에 있어서 심증을 제공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근거 ①의 경우 평소 이순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가졌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근거들이 말 그대로 '심증'이며 이것만으로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했음을 증명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막말로 근거 ①의 경우 이것은 '은둔설'뿐만 아니라 '자살설'의 근거가 될 수도 있으며, 근거 ②의 경우 당시의 한시(漢詩) 등의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상을 보여 주는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한 '심증'이 아닌, 이순신의 사망에 얽힌 구체적인 의문점은 근거 ③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조선 수군은 어째서 노량 해전에서만 자신들에게 불리한 야간 해전을 감행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근거는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손자병법」과 같은 병법서에서는, '유능한 장수는 싸울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고 싸운다'라는 것을 자주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임해야만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량 해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정유재란이 막바지에 다다른 1598년 말에는 이미 대부분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중이거나 혹은 철수를 위해 경상도 남부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전라도 순천에서 그 근처의 해안 지역인 왜교(倭橋)로 이동하여 해상 경로를 통해 철수하려 하였으며, 이에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 수군은 왜교를 해상 봉쇄하여 고니시 군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건네 주고 구원군을 요청하는 밀사의 통과를 허락 받았다. 그로 인해 11월 17일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일본 수군이 왜교로 향했으며, 이를 눈치챈 이순신은 18일 저녁 해상 봉쇄를 풀고 조선 수군을 이끌고서 일본 수군을 요격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했으며, 19일 새벽에는 일본 수군과 조·명 연합 수군간의 본격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우선 노량 해전 당시의 일본 수군과 조·명 연합 수군의 규모에 대해 살펴 보자. 일본 수군의 경우 함선 500여 척에 병력 60,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조·명 연합 수군의 경우 대·소선을 모두 합쳐 146척에 병력 19,600여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 가고 병력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마당에 시마즈의 수군도 고니시의 육군도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의 자세로 전투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일본 수군이 노량 해협을 지나 왜교를 봉쇄하고 있는 조·명 연합 수군을 역으로 포위 공격하면서, 동시에 왜교에 주둔한 고니시의 군대가 그 배후를 위협한다면, 연합 수군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순신으로서는 재빨리 노량으로 향하여 대양에서 일본 수군을 요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량 해전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듯이 조선 측이 만만하게 승리한 해전이 아니었으며, 양쪽 모두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결사적으로 맞붙었던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휘관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제 맘대로 전투 시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생각인 것이다.

근거 ④에 와서 이순신의 '은둔설'은 그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나는 남천우 씨가 은둔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기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④와 ⑤라고 생각한다. 즉 이순신의 사망 장면과 장례 과정을 기록한 사료에서 무언가 의문점이 발견되었기에,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근거 ①과 ②와 같은 심증이 덧붙여지면서 이순신의 '은둔설'이라는 새로운 가설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주요 근거들 중 하나인 ④가 뒤집혀진다면 사실상 '은둔설'의 기반은 크게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거 ④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만약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사료가 『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믿기 힘든 기록이나마 믿을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그것을 조작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료가 그 외에도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에는 사료를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보다 개연성 있는 사료를 정확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여러 가지 사료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면서 독전하기를 계속했다(『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4)


이순신은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날아오던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 나갔다. 이에 좌우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은‥‥그의 죽음을 숨기고서 이순신의 명령으로써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급하니, 군중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징비록」).5)


순신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역전을 하던 중에 적의 탄환이 그의 가슴에 맞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장막 안으로 부입(扶入)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 완은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으로 싸움을 더욱 재촉하니 군중에서는 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1월조).6)


(이순신이) 직접 나서서 왜적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이문욱(손문욱의 오기[誤記]인 듯[필자 註])이 곁에 있다가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면서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에 그대로 북을 울리면서 나가 싸웠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1월 27일조).7)


통제사 이순신이 죽은 뒤로는 손문욱 등이 정황에 맞게 잘 처리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문욱이 직접 판옥선 위에 올라서서 적의 형세를 둘러보면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했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8)


‥‥적이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곧 총을 집중적으로 쏘아 댔다.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맞았다‥‥ 공(이순신)이 크게 놀라 일어서는 찰라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 선상이 놀라고 황급해 하니 공이 이르기를, "도를 다하기 위해 총을 맞은 것이다" 하였다. 희립이 정신을 차리고‥‥ 옷을 찢어서 이마를 처매고 곧 장좌(將坐)에 돌아오니 공이 숨을 거둔지라. 아들 회가 통곡하려 하므로 희립이 부장(將佐) 여러 사람들에게 도와 줄 것을 명령하고 회의 입을 막아 곡을 못 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의 투구와 갑옷을 벗기고는‥‥대신 기(旗)와 북을 잡고 독전하여 점점 압박하고 몰아내니 비로소 적의 함대가 전열을 잃고 크게 흐트러졌다(임진왜란 당시의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던 은봉 안방준[1573∼1654]의 「은봉야사별록」의 '노량기사').9)


이상의 검토를 통해,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사료가 적어도 『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장」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경우 위의 사료와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사실에 대하여 「선조실록」은 「선조수정실록」과 그 내용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며,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의병장으로 활동한 안방준이라는 인물이 1627년에 기록하여 1633년에 간행한 「은봉야사별곡」의 '노량기사' 역시 이에 대해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그 내용 역시 이순신 사후 손문욱(孫文彧) 혹은 송희립(宋希立) 등 그 참모진에 의해 지휘가 이어졌다는, 전자에 비해 보다 '현실적인'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천우 씨의 '은둔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인 근거 ④가 사실상 기정 사실이 아닌 하나의 가설임을 입증할 수 있으며, 당시 이순신의 실제 사망 장면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더욱 필요함을 알 수 있다('선조수정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선대의 실록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실록으로, 인조 21년[1643]에 대제학 이식[李植]의 상소에 의해 그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에 의해 실록 수정이 주도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선조실록'과 판이하게 다른 부분이 많기에 그 내용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만약 남천우 씨의 주장처럼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 대한 「이충무공 전서」나 「징비록」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사실은 그가 제기한 '은둔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 남천우 씨는 「이충무공 전서」 등의 내용이 의심스럽기에 그것은 이순신의 은둔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료가 「이충무공 전서」와 같이 '의심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러한 주장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료들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선조실록」, 「은봉야사별곡」 과 같은 사료 역시 현존하고 있기에, 이러한 미심쩍은 면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굳이 '은둔설'이라는 심증에 입각한 가설을 제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4)'전사설'에 입각한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


지금까지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하고 있는 사실들 및 각 주장의 현실성 여부에 대한 검증을 통해, 위의 두 주장은 아직까지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의 사망 경위에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색다른 설명을 시도한 위의 두 주장과 같은 여러 가설들이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전후 상황이나 이순신의 평소 심리 상태 등 여러 심증을 무시한다면,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담은 모든 사료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은 바로 이것이다 - 함대의 제독인 이순신이 왜 적의 저격을 받을 정도로 선두에 나섰는가? 그리고 이에 대해 기존의 '전사설'은 명확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하는 반면, '자살설'과 '은둔설'은 나름대로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자살설'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함대의 선두에 나섰다는 것이고, '은둔설'에 따르면 이순신이 선두에 나서서 전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은둔을 위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점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전사설'에 입각하여 새로이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전사설'을 보완하고자 한다.

우선 총 18차례로 추정되는 이순신 제독의 지휘하의 조선 함대의 해전 중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선 경우는 3차례이다. 첫 번째는 사천 해전(1592.5.29)이고 두 번째는 명량 해전(1596.9.16)이며 마지막이 바로 노량 해전(1598.11.19)이다. 그 중 명량 해전의 경우에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 이후 사기마저 저하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압도적인 규모의 일본 수군에 맞서게 하기 위하여, 함대의 제독인 이순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천 해전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시 이순신이 선두에 나선 것은, 해안에서 성을 지키며 총포를 난사한 일본군 중 우리 나라 사람도 섞여 있었기에 이순신이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현·황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 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도 철환(鐵丸)을 비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 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들겼습니다('唐浦破倭兵狀').10)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함선 12척 모두를 잃은 반면, 조선 수군은 부상자 3명을 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상자 3명이 모두 조선 수군의 기함, 즉 함대의 선두에 나섰던 이순신이 탑승한 함선에서 나왔으며, 그 중에는 이순신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언제나 냉철한 자세를 견지한 완벽한 제독의 이미지와 함께, 이처럼 가끔씩은 감정적인 - 즉 인간적인 - 면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노량 해전은 바로 이 사천 해전과 거의 비슷한 양상이었다. 노량 해전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의 최후의 해전이었다. 물론 '최후의 해전'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후세 사람들일 뿐이지만, 당시 이순신으로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술렁거리기 시작한 일본군 전체의 정세를 눈치챘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명 연합군은 노량 해전에 앞서, 왜교에 주둔한 고니시 군이 해상 경로를 통해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막바지에 고니시 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대규모의 일본 수군에 맞서 싸우는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부상과 노환, 연일 계속된 전투와 격무로 인해 쇠약해진 몸, 2번째 백의종군과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가짐, 이러한 개인적 고뇌를 마지막으로 이 한 번에 떨치고자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두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오후 여섯 시쯤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또 노량으로 와 대는 것도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자정에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11)


그리고 노량 해전은 지금까지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겪어 온 해전과는 성격이 다른 전투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체 기간에 걸쳐 이순신이 견지해 온 전략은 출항통제(出港統制)와 협수로통제(狹水路統制)였다. 출항통제는 경상도 해안의 각 포구에 정박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기습적으로 각개 격파하는 것이며, 협수로통제는 일본 수군의 대함대가 전라도 남해안 혹은 서해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그 통로가 되는 좁은 수로를 막아서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들은 적극적이면서도 엄연히 수비 전략이었으며, 그것은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규모에서 뒤졌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해전 이후 전과 확대에 몰두하느라 도망가는 상대를 무리하게 추격하거나, 한 전역(戰域)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적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일본 수군도, 왜교의 고니시 군에 대한 해상 봉쇄망을 뚫기 위해 이 해전에 필사적으로 임했다. 게다가 양측의 병력 역시 일본 수군이 함선 500여 척에 병력 60,000여 명, 조·명 연합 수군이 함선 146척에 병력 19,600여 명의 대병력이었으며, 이는 전체 전쟁 기간 동안 칠천량 해전과 맞먹는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즉 노량 해전은 시기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에 걸쳐 마지막으로 벌어진 해전일 뿐만 아니라, 참여한 병력 및 양측의 마음가짐 면에서도 사실상 전쟁을 마무리하는 함대 결전(決戰)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일하게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도망가는 적 함대를 추격하여 전과 확대를 꾀하였고, 그를 통해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할 수 있었다(또한 100여 척을 나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순신이 주로 구사하였던 전술이 원거리 포격 전술이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하겠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섰다는 사실이, 전사를 위장하여 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은둔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조작된 사실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상당 부분 현실성을 갖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순신은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르는 해전에 임함에 앞서 필사의 마음가짐을 다잡았으며, 역시 필사적인 자세로 전투에 나선 일본 수군과 최후이자 최대의 함대 결전을 치렀다. 그리고 승세를 몰아서 퇴각하는 적 함대를 추격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함대의 선두로 나섰을 가능성이 크며, 그로 인해 유탄에 맞아 전사할 가능성도 커졌을 것이다.

물론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서지 않고도 전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노량 해전에 참여한 명의 수군은 작은 함선 63척에 병력 2,600명에 불과했으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도 적었다. 그들 중 도독인 진린(陳璘)과 등자룡만이 판옥선을 타고 선두에 나서서 싸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징비록」과 「은봉야사별곡」 등의 사료에 따르면, 조선 수군이 전투 중 적선에 포위된 진린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은봉야사별곡」에 따르면 이순신이 친히 기함을 이끌고 진린을 둘러 싼 포위망을 풀어 주었으며, 그로 인해 기함의 위치가 발각되어 적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적선이 당선(唐船, 明軍兵船)으로 모여들었다. 도독이 포위되고 말았다. 공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포위된 아군 선단을 풀었다‥‥ 적이 흐트러지는가 하더니 다시 모였다. 그리고 적이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곧 총을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맞았다‥‥ 공이 크게 놀라 일어서는 찰라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12)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여 보겠다. 노량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밤 1∼3시(四更) 무렵에 노량 해협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벽 4시 무렵에 관음포 앞 바다에서 500여 척의 일본 수군과 맞서 싸워, 그들을 관음포 안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좁은 관음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 전술뿐만 아니라,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 들여 불을 지르거나 가라앉히는 등 육박 전술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올랐는데, 「이순신과 히데요시」의 가다노 쯔기오(片野次雄) 씨는 일출 시간인 이 무렵에 이순신이 저격당했다고 주장한다.


격전이 한창인 중에 날이 밝았다. 사방이 밝아지자 근접 거리에서 쏘는 사수에게는 표적이 훨씬 분명히 보이게 되었다. 순간 기함의 사령탑을 노리고 총화가 맹렬히 집중됐다‥‥ 정확하게 이순신을 노리고 쏜 한발의 탄환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몸에 꽂혔다.13)


이 두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의 기함이 굳이 선두에 나서지 않아도 그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것이 충분히 개연성을 갖추게 된다. 즉 이순신이 친히 기함을 이끌고 진린을 도와 주었다가 그로 인해 기함의 위치가 발각되어 집중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고, 적과 아군이 뒤엉킨 혼전 중에 떠오른 태양으로 인해 기함의 지휘소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그 기반에, 이순신의 죽음은 '전사'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아 두고서 제기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나는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굳이 '자살'이나 '은둔'이라는 심증에 기반한 주장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으며, 여러 사료와 해전 전후의 상황을 통해서도 이순신의 '전사'는 확고한 사실임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3.결론 - '자살설'과 '은둔설'의 등장 배경 고찰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사실상 비현실적이거나 근거가 부족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았다. 물론 위의 본론에서 나는 남천우 씨가 제시한 근거 ⑤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어째서 이순신의 장례가 그토록 미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15년 뒤에 묘지가 이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기가 힘들다. 단지 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후일에 다시 묘지를 이장하였다고 가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근거 ④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사망 후의 장례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사설'에 대해 하나의 이견이라 할 수 있는 '자살설'이나 '은둔설'은 어찌하여 등장한 것일까.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사망 장면에 대한 여러 사료의 일관되지 못한 기록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본 사료에서 공통된 부분이란,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내용뿐이며, 그 이후의 지휘권 이양이나 전투 지휘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는 저마다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견이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순신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음모 이론'과 그에 대한 '동정론'일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 오늘날로 하면 해군 참모 총장이라는 최고의 지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일개 병졸로 백의종군하게 되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도 해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임진왜란 전체의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던 이순신 제독이 역적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고 강등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천우 씨는 그 이유로 선조라는 한 인물의 시기심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설령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을 지라도 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이순신은 은둔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죽음에 있어서 보다 극적 비장미와 동정심을 더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능한 선조와 조정 대신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살'이라는 설명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들 외에도 그와 기록된 내용이 서로 다른 사료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게다가 사료들 간의 그러한 차이를 해석하기 위해, '음모 이론'과 '동정론'이라는 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본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각인된 인식으로 본다면, 이순신을 역적으로 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는 전제 봉건 정부였으며, 왕권의 강화와 현 체제의 유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상 과제였다. 이를 무시하고서 단지 한 개인의 검증되지 않은 '시기심'을 통해 이순신의 미래에 대해 '음모 이론'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에서 다양한 사료들 중 어느 한 쪽의 견해만을 지니고 있는 사료를 선택적으로 선택하여 '자살설'이나 '은둔설'이라는 주장을 전개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의 사료에 입각해 볼 때, 아직은 '자살설'이나 '은둔설'과 같은 이견이 기존의 '전사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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