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기술유출인가, 마녀사냥인가 - 산업스파이냐 해외 취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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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g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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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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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기술유출인가, 마녀사냥인가]

산업스파이냐 해외 취업이냐
과학기술 인력 외국 눈길 ‘기술 유출 시비’ 가열 …‘기술 국수주의’ 땐 엉뚱한 피해 부를 수도

12월2일,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는 국내 주요 LCD 제조업체인 A사의 6세대 TFT-LCD 컬러 필터 공정 기술을 대만 업체에 유출하려 한 혐의로 벤처기업 대표 차모씨(44)와 A사 전 직원 류모씨(36), 김모씨(32)를 구속 기소했다. 또 같은 혐의로 A사 전 직원 김모씨(34)를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들이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영업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의 제보로 검찰이 수사한 이 사건은 검찰 발표대로라면 무려 3700억원을 들여 개발한 최첨단 기술을 빼돌려 우리나라에 1조3000억원의 막대한 피해를 안길 뻔한 중대 사안이다. 대다수 언론은 이를 최근 화두로 떠오른 ‘대(對)중화권 기술 유출 사례 방지의 백미’로 대서특필했다.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 이득홍 부장검사는 “피의자들은 대만 업체로부터 고액 연봉에 주택 및 자동차 제공까지 제의받았다. 만일 이들이 계획대로 대만 회사에 취업했다면 국내 첨단기술이 유출돼 커다란 국가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류씨 등은 대만 기업체에 취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이 이직과 함께 A사의 핵심기술을 유출하려 했다는 일부 물증 및 정황 증거에 따라 이들을 기술 유출 미수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검찰은 이들의 ‘미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올 8월 A사 전 직원인 3명의 피의자는 대만의 한 LCD 기업과 지분 관계로 얽힌 차 사장을 통해 “1인당 1억원 이상의 연봉을 지급할 테니 대만 기업으로 이직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이에 류씨는 차 사장과 함께 대만 업체를 방문하고 연봉을 2억원으로 수정 제의했다.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검찰은 “그 정도의 액수를 요구했다면 기술 유출에 대한 대가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피의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A사 퇴사 직전 대만에 유출할 목적으로 무려 34기가(G)바이트의 ‘(공장 운영 관련) 영업비밀 자료’를 몰래 복사했다. 이들은 A사에 입사할 때 “퇴직 후 3년간 동일 직종으로 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퇴사 직후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는 등 해외 취업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검찰 발표에 따라 대다수 언론은 피의자들을 ‘국부를 유출하려 한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인터넷 여론도 들끓었다. 그러나 피의자들은 일관되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피의자 측 변호인인 양승은 변호사는 “새 직장을 수소문한 것 자체가 죄가 되냐”고 반문했다. 이들은 첨단기술 유출을 조건으로 이직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잡고자 했던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양 변호사는 또 “이들이 업계 관행인 ‘퇴사 후 일정 기간 내 동일 직종 취업 금지’ 조항을 어길 뻔했으나 이는 ‘계획’이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 3명의 엔지니어는 언론에 첨단기술 ‘연구원’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학사급 기술직원으로, 기술개발 파트가 아닌 공장 설비 엔지니어로 일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새 직장 수소문한 것 죄가 되느냐”

이 사건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피의자들이 ‘실행하지 않은 범죄’를 이유로 기소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들의 기소에 적용된 법은 영업비밀보호법이다. 이 법은 2003년 말 산업자원부(이하 산자부) 주도로 기술 유출의 ‘예비ㆍ음모와 미수’까지 처벌할 수 있게끔 대폭 강화됐다. 이번 사건은 개정법이 두 번째로 적용된 사례지만 개정 법률의 특징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첫 사례가 됐다(19쪽 상자기사 참조).

실제로 이들은 10월 초 이직 계획이 국가정보원을 통해 A사에 알려지자 곧 대만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국내 기업 재취업을 준비했다. 검거 일인 11월8일까지 가족의 대만 비자조차 만들어놓지 않았다. “출국 준비 중에 검거했다”는 검찰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다. 게다가 이들은 고용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피의자들은 대만 기업으로부터 받은 이직 조건이라는 것도 “LCD 모니터 제작에 쓰이는 컬러 필터의 불량률을 3% 정도 줄여달라”는 것뿐이었다고 한다. 피의자들은 “TFT-LCD 사업은 기술 싸움이 아닌 자본 싸움이다. 게다가 ‘컬러 필터’의 원천기술 및 방법 특허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 90% 이상 보유하고 있다. 우리가 이직하려 한 대만 기업 또한 일본 기업으로부터 이미 기술을 이전받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피의자 중 한 명이 회사 자료를 복사한 것은 사실이나 이 또한 국외로 넘겨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 자료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첨단기술을 담고 있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말이다. 자료를 복사한 당사자인 김씨(32)는 “이직 후 개인 경쟁력을 높이는 데 참고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불법으로 회사 영업비밀을 유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업비밀 유출 ‘미수’가 성립하는 시점이 기술을 불법 복사(절취)한 시점인지, 아니면 이직의 대가로 기술 유출을 합의한 순간인지는 법리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다.

영업비밀보호법이 규정하는 ‘비밀’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도 문제다. 근로자는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한 부분도 법 해석에 따라서 ‘기밀’로 둔갑할 수 있는 것. 젊은 과학기술인들의 모임인 ‘과학기술자연합’ 사이트에는 이와 관련, “노트북 PC에 회사 자료 하나 없는 엔지니어가 어디 있나. 회사가 앙심을 품으면 처벌 못할 직원이 없을 것”이라는 불만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 역시 실제 취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국가정보원이 이들의 출국 기록을 조회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일파만파로 커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술 유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시점과 잘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LCD 기술 유출 건이 기업 보안을 명분으로 한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11월 내내 화제가 됐던 CDMA 기술 유출 논란은 이해 기업 간 알력, 언론의 마녀사냥식 보도로 촉발된 것이다.

10월8일, 한 중앙일간지 1면에 ‘세계 1등 한국 CDMA 기술 중국 유출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CDMA 장비 제조업체인 현대시스콤이 올 3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국 비즈니스가 많은 미국 기업 유티스타컴(UTStarcom)에 CDMA 관련 지적재산권(기술·인력 및 관련 장비)을 120억원에 넘기는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다. 현대시스콤 측은 “이런 사실을 최근 경영권을 인수한 새 대주주(벤처기업 하니엘)가 회사를 실사하면서 뒤늦게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보도의 충격파는 컸다. 각 언론은 앞다퉈 비슷한 내용을 반복 보도했으며, 인터넷에는 현대시스콤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곧이어 거래를 주도한 현대시스콤 전 대주주인 ‘쓰리알’ 장성익 대표에 대한 수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11월26일,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는 장 대표의 기술 유출(대외무역법 및 기술개발촉진법 위반) 건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럼에도 장 대표는 구속기소됐다. 사유는 기술 유출이 아닌 횡령 혐의. 검찰 측은 애초 구속 수사를 벌인 부서도 컴퓨터수사부가 아닌 금융조사부라고 밝혔다. 현대시스콤의 주식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저질러 이전부터 별도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 대표와 현대시스콤은 이미 언론에 의해 ‘국가의 소중한 기술 자산을 빼돌려 착복한 매국노’로 낙인찍힌 뒤였다.

‘ 비밀’ 광범위 회사가 앙심 품으면 모두 처벌

기술 유출 보도가 나간 직후부터 통신업계에서는 “머니 게임에 몰두한 벤처기업 간 이권다툼 때문에 정상적 기술 거래가 불법 기술 유출로 둔갑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우리나라 CDMA 기술 개발의 산실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고위 관계자조차 “ETRI와 현대시스콤 간 민사소송의 여지는 남아 검찰 조사 결과를 존중한다. 문제가 된 2세대 기술 또한 중요하나 국내에서는 8년 전 상용화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유티스타컴 대주주가 중국계 미국인이라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지만, 그러려면 또 별도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다 중국은 이미 3세대 CDMA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숙련된 기술 인력의 유출을 막을 방도와 노력이 부족한 점이라는 것이다.

최초 보도에서 현대시스콤 기술 일부에 대한 공통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삼성전자와 LG전자 측 역시 “법적 조치를 취할 이유가 없으며 사건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쩌다 장 대표와 현대시스콤은 ‘매국노’로 몰렸을까.

현대시스콤과 전 대주주인 쓰리알 장 대표가 지적재산권 매각에 나선 것은 극심한 자금난 때문이었다. 백방으로 살길을 찾던 중 유티스타컴과 선이 닿았다. 관계 부처에 문의하니 CDMA 기술은 전략물자로 분류되는 만큼 허가를 위한 심의에 2개월 넘게 걸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현대시스콤 고위관계자는 “빨리 거래를 성사시킬 방법을 찾다 아예 유티스타컴이 통신기술 강국인 우리나라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는 안이 제시됐다”고 밝혔다. 곧 국내 법인인 유티스타컴 코리아가 설립됐고 거래도 성사됐다. 유티스타컴은 1000만 달러의 매입대금 중 700만 달러를 우선 현대시스콤 측에 지불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거래 직후 쓰리알이 자금난에 몰리면서 현대시스콤 경영권은 장 대표와 평소 친분이 있던 하니엘 이모 대표에게 넘어갔다. 현대시스콤 고위관계자는 “회사 실사도 없었고 오간 돈도 없었다. 하니엘 측은 당연히 유티스타컴과의 거래를 잘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동안 하니엘은 “회사 인수 후에야 거래 사실을 알았다”고 주장해왔다.

새 대주주가 된 하니엘은 현대시스콤 이름으로 해외 사업을 구상했다. 그러나 해외 사업권은 이미 유티스타컴에 넘어간 상태. 계약 내용을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유티스타컴이 거절하자 하니엘 측은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이전 거래는 기술 유출이니 무효가 돼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한 것이다.

하니엘은 먼저 산자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산자부 담당자는 “국내 자회사와의 기술 거래 자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나, 이것이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말이 많아 판례를 받아볼 필요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산자부는 8월 현대시스콤을 ‘허가 없는 전략물자 수출을 금지한 대외무역법 등을 어긴 혐의가 있다’며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는 지지부진했고, 이 와중에 신문 보도가 나간 것이다.

신문에 사건을 제보한 이는 현대시스콤 부사장 B씨. B씨는 바로 최초로 보도한 신문사의 전 정보통신담당 기자였다. B씨는 “언론 플레이를 하려던 게 아니라 상가(喪家)에서 기자를 우연히 만나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언론 보도로 장 대표에 대한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이로 인해 현대시스콤 현 대주주인 하니엘 이 대표마저 수사 대상이 되자 B씨는 ‘지나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됐다. 이 대표는 현재 중국에 체류 중이며, 국내와의 연락은 사실상 두절된 상태다. 현대시스콤 고위관계자는 “언론, 산자부, 검찰 등이 모두 하니엘의 ‘엉뚱한 욕심’에 놀아난 꼴”이라고 말했다.

유티스타컴과의 거래를 담당한 변호사는 “외국과의 적법한 거래에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만약 외국 기업 국내 자회사와의 기술 거래마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관련 법을 고쳤어야 한다. 또 어떤 기술이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는지를 명확히 해야 하며, 그럴 경우 해당 기업이나 엔지니어가 입는 손실에 대한 구제 제도도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적법한 거래에 난리 국가 위신 떨어져

최근 언론에는 ‘중국이 기업 인수합병, 국내 지사 설립, 핵심인력 스카우트 등을 통해 한국의 첨단기술을 빼내가고 있다’는 류의 기사가 넘쳐나고 있다. 올 10월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자동차 인수를 결정했을 때도 대다수 언론은 “쌍용차의 SUV 차량 제조 노하우가 중국에 넘어가게 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게임업체인 엑토즈소프트의 경영권이 중국 온라인게임 유통업체인 산다사로 넘어간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역시 비슷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각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 또한 너나없이 “단순제조업뿐 아니라 첨단산업마저” 하는 개탄을 쏟아내 놓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이 어떻게 유출됐다’는 내용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휴대전화 하나, LCD 모니터 하나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특허권은 수천가지에 이른다. 그중 정말 ‘핵심기술’이라 할 만한 것의 수는 많지 않다. CDMA 기술에 바탕한 휴대전화만 해도 원천기술은 우리나라 기업이 아닌 미국의 퀄컴이 보유하고 있다. 피해액 산정도 두루뭉수리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CDMA 기술이라면 지금까지의 기술개발 투자액 전체와 휴대전화 수출액 전체를 언급하는 식이다.

이러한 기조에 대해 과학기술인들은 “보안도 중요하지만 뜬금없는 ‘기술 국수주의’로 인해 오히려 엉뚱한 피해를 보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당한 대가 없이 중요 기술을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큰 문제다. 물론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업이 핵심기술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면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여기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거래하거나 국내에서 인수처를 찾지 못한 기업이 해외에 팔려나가는 것까지 전부 도덕적 단죄 대상으로 삼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변이다.

한 대학의 자동차 관련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엔지니어 C씨는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가 외국 기업에 넘어간 것은 괜찮고, 왜 쌍용차만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또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선진 외국의 기술을 이전받고 엔지니어들을 영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가 있었다. 그러한 필요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적법한 인수합병까지 일일이 문제 삼다가는 오히려 우리 기업이 부메랑을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기술 이전 받으면 ‘선’ 반대는 ‘악’ 취급

CDMA 기술개발 권위자인 통신업계의 한 유력인사 또한 “우리나라가 외국 기술을 들여오고 외국 R&D 센터를 통째로 사 기술 이전을 받는 것은 ‘선(善)’이며, 반대는 적법해도 ‘악(惡)’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과학기술 종사자들의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퇴직 후 일정 기간은 재취업을 금한다’는 식의 논리가 통용되고 또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정보통신 전문가는 “기술 자체보다 숙련된 엔지니어의 유출이 더 심각한 문제다. 그들이 외국이 아닌 국내 기업을 택하게 하려면 기여도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무조건 민족의식을 가져라, 한 회사에 충성하라는 요구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LCD 기술 유출 사건 재판을 참관한 한 엔지니어는 “막말로 의사가 해외로 진출하면 국위선양이고, 기술자가 해외 취업하면 산업스파이냐. 해외 이직을 고려했다는 것만으로 기술 유출 사범으로 몰아가는 수사 당국의 태도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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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된 영업비밀보호법은
예비·음모 죄까지 -신설해 처벌?
 
개정된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은 과거 해당 기업의 전ㆍ현직 임직원으로 한정했던 처벌 대상의 제한을 없앴으며, 보호 대상을 종전의 ‘기술상’의 영업비밀에서 해당 기업의 경영전략, 투자계획 등 경영상 영업비밀로까지 확대했다. 심지어 피해자의 고소ㆍ고발이 없더라도 수사 착수는 물론이고,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예비ㆍ음모와 미수죄까지 신설해 기업 보호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당초 산업자원부는 “기술은 유출된 뒤에는 처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사전 차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취지의 개정 이유를 밝혔지만, 공론화 과정이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게다가 판정하기 아리송한 ‘기술 유출’이라는 혐의를 두고 예비ㆍ음모죄까지 처벌할 수 있다는 의미는, 모든 과학기술자를 예비 범죄자로 간주하는 ‘산업계의 국가보안법’이나 다름없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철저하게 가로막는 독소 조항”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며, 법조계에서는 “사람의 심리 상태에 속하는 ‘음모’를 법률적으로는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권 침해 요소가 많다”고 지적한다. 마치 SF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예고시스템’처럼 회사에 불만을 품고 이직을 계획하는 순간 처벌을 감내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현행 법률이 회사의 영업비밀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크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그렇다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직장을 옮기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우려했다. 또한 현재 관행적으로 ‘영업비밀’에 속하는 회사 문건이 집 컴퓨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상황에서 과도한 법안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이번 검찰 수사에서는 이미 다 지워버린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구해내는 ‘컴퓨터 포렌직(forensics, 사후 조사)’ 기술까지 선보였기 때문에, 퇴직자는 관련 하드디스크를 모조리 폐기하지 않는 한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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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정보 전쟁
산업스파이 색출 인력 두 배 증가

 
 
 세계가 첨단기술을 훔치고 빼앗는 정보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각국은 기술 유출을 막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각국의 정보기관은 경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존재 이유를 경제정보 및 기술정보, 산업정보 수집에서 찾게 됐다.

한국에서는 국가정보원(원장 고영구·사진·이하 국정원)이 1993년부터 산업스파이 색출 및 보안지도 활동을 전개해왔다. 나름대로 성과도 올렸다. 이런 활동에 관한 한 과거 ‘인권 침해 시비’를 벗어나 국민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의 대(對)산업스파이 관련 파트는 인력이 대폭 충원돼 조직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커졌다. 관련 조직이 2차장(해외 파트) 아래 직속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인원이 과거 정권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최근 정보망에 포착되는 산업스파이 사건의 특징은 막대한 피해가 뒤따르는 핵심기술의 유출 시도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전직을 노리거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발적 스파이도 늘고 있다.

국정원이 산업스파이를 추적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 제보, 인지, 기획이 그것이다.

제보는 주로 직원들의 비위를 의심한 경영진 등 업체 내부에서 나온다. 한창 벤처기업 열풍이 불 때는 서울 테헤란로의 술집 마담한테서 “A사 기술로 뭘 한다고 하던데요” 하는 식의 정보를 얻기도 했다. 인지 수사는 유능한 연구원이 특별한 직장을 이유 없이 그만두거나 이직할 경우 스파이로 의심해 추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기획 수사는 국정원 해외 주재 요원이 보내온 산업정보를 바탕으로 시작된다. 중국이나 대만 등에서 특정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지면 관련 한국 기업에서 기술이 샌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국내 기업 목록을 뽑는다. 그리고 ‘지우개 방식’으로 혐의가 없는 기업을 지워나가면서 용의자를 추적한다.

국정원은 검찰, 경찰, 기무사령부(국군)와 산업스파이 색출을 위해 네트워크를 구성해놓았고 ‘민관산업보안협의회’를 만들기도 했다. 민관산업보안협의회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69개 첨단사업체 및 경제단체가 모여 꾸려졌다. 국정원은 또 2차장 산하에 새로운 산업방첩 부서를 신설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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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발행일 : 2004 년 12 월 23 일 (465 호)

  • 김선영 ()

      검거되신 분들만 괜히 불쌍하군요. 마녀사냥당해서 본보기로 심하게 매질당할 거 같습니다. 팬택으로 이직하신 분들도 이런식으로 당한거죠. 뭐...

    항상 본보기라는게 무섭습니다. 언젠가 식당에서 밥먹으면서 뉴스를 보다가 기술유출이야기에 몇천억 손해 이런거 나오니까 대뜸 옆자리서 저런놈들은 가족까지 모두 쳐넣어야돼라는 말이 나오는것에 흠짓 놀랬던 적이 있었죠... 잠재적으로 엔지니어는 국민의 노비가 된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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