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과학 기술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던져주는 교훈: 이대올로기로서의 '과학 기술의 민주화'를 경계한다. - 이문웅(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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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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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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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과학 기술에도 참여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시작된 사회학자 김환석교수의 주장에 대해 물리학자 오세정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된 과학 기술의 본질을 둘러싼 논쟁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비전문가들에게도 인류 문명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은 같은 학문분야 안에서 공통의 학문적인 도구와 틀을 사용하면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두 학자에 의해서 주고 받은 것이기에 마치 그것이 각기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대표하는 학자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인 인류학 ) 문제의 이 논쟁에서 '인류학'이란 용어가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국외자들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치 오래된 문화 전통을 가진 다른 문명사회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외부의 인류학자가 그 생활형태를 자신의 잣대로 잘못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오세정)고 표현되었다. 물론 인류학자도 때로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잣대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려는 태도, 즉 '자문화중심주의'는 인류학자들이 타문화 연구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접근방식이기에 인류학이 마치 '문화상대주의'를 포기한 학문인 것 같은 오해는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번은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적 자양이 되고 있는 다양한 학문적 접근들 중에서 '과학기술인류학'이 거론(김환석)되었다. 우리는 한 학문분야의 명칭을 쉽게 접미어로 붙이지만, 이 경우는 사회문화체계의 한 부분으로서의 과학기술을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한 연구분야로 필자는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적 자양이 되고 있다는 표현은 아전인수격의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자연과학의 관점을 거론할 자격이나 능력은 없다. 다만 이 논쟁에서 제기된 사회과학적인 관점들은 사회과학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중 상당한 부분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사실 같은 학문분야 안에서도 특정 이슈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날 수 있고, 또 학문분야간에도 이런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이번 논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사이에 서로 다른 '두개의 문화'가 존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이 토론이 양자간의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마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특히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회과학도 여전히 '과학'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2. 과학 기술의 본질



이 논쟁에서는 과학 기술이 마치 한가지를 뜻하고 있는 것 같이 '과학기술'로 표현되고 있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많은 경우에 기술을 거론하면서 '과학' 또는 '과학기술'로 표현하고 있는 등의 개념적인 혼란을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오세정교수는 기술의 목표를 "과학적 지식을 인류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으로 분명히 규정하고 있지만, 두분이 모두 과학을 거론할 때에도 '과학기술'로 표현하든가, 기술을 가르키면서도 역시 '과학기술'로 표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등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 기술은 '과학'과 '기술'의 합성어이다. 그러기에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로 표기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과학과 기술 중 어느 한가지를 뜻하면서 '과학기술'로 표현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 필자는 과학 기술이 과학과 기술 두 가지를 가르키는 합성어라는 점에서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과학기술'이 아닌 '과학 기술'이라는 식으로 띄어쓰기를 하겠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현상을 관찰하여, 기술하고, 그것이 왜 우리가 관찰하는 바 그런 식으로 나타나거나 전개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여기에 따라서 예측까지 가는 것이 과학의 이상이라고 하겠다. 물론 과학의 연구대상은 인간의 사회문화 현상과 그 이외의 자연현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전자는 사회과학, 그리고 후자는 자연과학의 대상이 된다. 과학은 그 이론이 정당화되는 절차, 즉 타당성의 근거가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개방되어야만, 다시 말해서 객관성을 지닐 때에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본질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어떤 사람의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다른 사람에게는 확인될 수 없든가 닫혀있다고 한다면 그의 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자의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과학'이라는 용어를 명사로 사용한다. 그러나 '과학'을 동사로 사용하여 과학적인 작업을 하는 인간 행위로 파악한다면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한 발작 더 닥아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학자 레스리 화이트의 ?과학은 과학하는 것이다(Science is Sciencing)? ) Philosophy of Science(Vol., 5: 369-389, 1938); 이 논문은 그의 단행본 The Science of Culture(by Leslie A. White, 1949)에 제1장으로 재수록되어 있다. 라는 제목의 한 고전적인 논문은 과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은 사회 및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인간 행위이다. 이렇게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과학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술이나 종교도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고, 예술가는 구체적인 작품이라는 특수성으로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같은 일반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주술이나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여서 현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그 타당성의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자는 일반성에 의거해서 특수성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작업과는 반대 방향으로 접근한다. 물론 과학이냐 비과학이냐에 따라서 그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설명은 나름데로의 가치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즉 주술이나 종교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 근심,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감을 심어주는 등의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인류 문명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과학의 발달이 현대문명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진보의 문턱을 한 단계식 넘을 때마다 주술 및 종교로부터 끈임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을 과학사는 잘 말해주고 있다. 앤드류 화이트의 セ기독교 국가에 있어서 과학과 신학 간의 투쟁의 역사ソ(1896) )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by Andrew Dickson White, 1896; 이보다 20년 전에 출간되었고, 또 이 책의 모체가 되었던 그의 The Warfare of Science는 セ과학과 종교의 투쟁ソ(김재홍 역, 삼중당, 1978)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는 과학의 각 분야에서 종교와의 투쟁이 얼마나 격렬했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주술과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서도 과학은 '형이상학'이라는 또 다른 고비를 넘어야만 했다. 특히 사회과학 분야에는 이 점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즉 어떤 현상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존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식의 형이상학적인 해석이 주술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대체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인 해석은 드디어 '과학'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문화현상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행위자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의(anthropocentric) 해석은 사회과학에 여전히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다. 바로 이점이 필자가 이 글에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이다. 이점은 뒤에서 좀 더 깊이있게 다루고자 한다.

다른 한편 기술은 인류가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초기인류 시대로부터 생활양식의 기초가 되었고, 끊임없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흔히 우리는 기술을 이야기 할 때 '과학적인 지식'을 인간 생활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그것이 꼭 '과학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원시인들의 생활양식에서도 기술은 생존을 위한 바탕이 되었었고, 그때의 기술이란 바로 '사실적인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돌도끼를 만드는 기술은 그것이 날카롭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데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에 생존을 위한 중요한 도구였다. 또한 그것은 아무 돌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흑요석과 같은 견고한 돌이라야 한번 만들어서 비교적 오래 쓸 수 있다는 사실적인, 그리고 경험적인 지식에 의거해서 원시인들은 돌도끼를 만들 흑요석을 찾아내거나 얻는 데에 안간 힘을 ?던 것이다.




3. 과학과 정책결정



이 논쟁에서 키 워드로 제시된 '과학기술의 민주화'(김환석)란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 채 소수의 전문가나 엘리트 과학자들에 의해서 과학기술 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아서,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기술의 발전경로를 촉진하는 계기로 삼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우리 인류의 문명이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과학기술과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성을 제도화하여 보다 안전하고 인간적인 미래를 열어가게 하는 토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나온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자연과학으로부터 과학기술의 본질은 '가치중립적'이여서, '그 태생적 원인 때문에 본질적으로 위험사회를 초래하는 부정적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는 예단 또한 매우 독선적이며 균형을 잃은 시각'(오세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과 '가치'라는 해묵은 쟁점에 잠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에서 자연과학자 오세정교수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는 반면, 사회과학자인 김환석교수는 이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모든 사회과학자가 마치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필자는 금할 수 없다. 필자는 이 '가치중립성'이 모든 과학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논쟁을 주고 받은 두분이 모두 "과학적인 지식은 진리이되 항상 불확실하고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성격의 진리"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지식사회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과학기술사회학의 입장에 선 김환석교수는 "과학지식의 구성에는 사회적 요인이 개입한다"면서, "과학기술이 보편합리성의 화신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식의 '사회적 구성론'에 입각해서 과학 기술의 탈신비화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과학의 이론들이 과학자의 관심이나 이해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과학적 이론은 객관성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지만 연구자의 주관적인 가치가 개입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성을 결코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과학적인 지식은 지금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들과 함께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나온다면 결국 새로운 이론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더러는 과학자들의 집단이나 학파를 중심으로 허점이 많은 기존 이론이 어느 정도 기간은 버틸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점은 과학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곧 과학과 가치의 문제로 귀착된다. 비록 과학적인 탐구에서 과학자의 주관적인 가치 또는 가치관이 현상의 분석에 어느 정도 개입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치중립성을 포기해도 좋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치중립성은 아마도 영원히 완벽하게 달성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자는 가치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연구자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문제는 과학자들 사이의 활발한 비판적인 논의를 통해서 걸러질 수 있는 것이고, 이론의 객관성이 전혀 무시된 채 증거에 접근하는 길이 연구자 본인 이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하면서 그냥 믿으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결코 과학자가 제시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없다. '절대적인' 진리를 얻으려면 종교의 영역에 가서야 얻을 수 있으리라. 내 '과학'과 네 '과학'이 다르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현대의 인류는 문명 발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현대 문명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문명의 발전을 우리 인류로 하여금 더욱 편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인류의 생존가치를 높혀주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우리는 그 문명이 우리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환경 오염 및 환경 파괴, 핵 공포, 인류의 생명마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각종 화학약품 공해 등은 모두 우리가 누려온 발전된 현대 문명의 값비싼 대가임이 틀림없다.

물론 이런 발전된 현대 문명의 기반은 과학 기술의 발달이고, 이 과학 기술적인 지식을 적용하여 자연의 일부를 개조하고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만들어 나가려는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현대인을 옭아매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인류 문명의 위기에 대한 책임이 과학자 및 기술자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 우선 과학은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에 의거한 설명 또는 해석이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는 관찰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현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인류의 생존에 기여할 것이라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것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정책 결정의 문제이다. 즉 그것이 인류의 복지 증진에 기여했는지 아니면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는지는 정책 결정의 결과이고, 또한 이것은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이때의 가치 판단도 대안들을 두고 각각에 대한 철저하고도 객관적인 분석에 의거해서 해석을 내리고, 또한 예측을 하는 등의 '과학적'인 작업에 의거해야만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여하튼 정책결정에는 여러 가지 대안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과학과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1998년 여름 중국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홍수를 맞아서 양자강이 범람하는 등의 혹심한 피해를 보았다. 이때 양자강 유역의 여러 도시가 물에 잠겼는 바 중국 당국은 하류에 위치한 내륙 최대의 공업도시 우한(武漢)을 살리기 위해서 상류의 제방 여러 곳을 계획적으로 끊어서 피해를 줄이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중요한 정책결정에는 어느 지방 또는 도시를 살릴 것인지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결정이었다. 더 많은 인구와 국가적인 핵심 산업도시를 살리기 위해서 이보다 작은 도시를 희생시켜야하는 문제에 단안을 내린 것이다. 희생되는 측에서는 이 결정이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느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고 또 국가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인지의 핵심적인 사안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결정이었으리라.

바로 이런 중대한 정책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과학자가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까? 과연 가치중립성을 포기한 과학자들이 이 과정에 개입하여 가치 판단에 입각한 서로 자기 주장을 폈다면 그 결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는 항시 잠정적이다. 더 좋은 설명이나 해석이 나온다면 자리를 비켜주어야만 하는 것이 과학의 생리이다. 과학의 연구 결과가 잘못 이용되어 인류의 복지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때에 그 책임을 과학자 자신이 저야 한다면 많은 경우에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숨겨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연구결과가 인류의 복지에 기여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인류의 장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치판단에 휩싸이지 않은 과학적인 연구작업과 정책결정을 구분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과연 현대문명의 발전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에 제동을 걸고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과학기술의 발전경로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인류의 문명 중 과학 기술의 영역을 소수의 전문가나 엘리트 과학자들에게 맡겨놓을 수가 없다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즉 과학 기술이 보편합리성을 주장함으로써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정책결정에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시민을 의식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과학기술시대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또한 그것이 이 논쟁의 초점을 흐려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문제의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민주화를 가르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환석교수가 예로 들고 있는 데에서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다. 즉 핵폐기물 처리장, 쓰레기 소각장, 시화호 건설 등의 대형 환경관련 사업에서 주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구하고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과학적인 연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지식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대형 사업에는 그것이 비록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선 어떤 식으로든지 피해를 보는 개인이 있을 수 있다. 정책결정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서 개인 및 시민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공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잠재적인 피해 당사자와 관련 시민단체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민주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마치 과학 기술의 연구개발 및 설계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고 있다는 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환석교수는 '참여설계'라는 하위 제목 밑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만약 과학적인 연구작업에서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지금 당장에 연구를 중지해야할 분야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핵 에너지 연구든, 독극물 연구든, 유전자 조작에 관한 연구든간에 과학적인 연구계획이 비전문가인 시민과 합의를 통해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학문적인 경쟁시대에는 항시 다른 나라에 뒤지게 되는 과학기술의 후진성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어떤 연구든 간에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모두 있을 것이고 그 결과를 알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과학과 기술을 구분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앞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과학은 현상의 설명과 예측이 목표이고 기술은 그런 과학적인 지식을 인간이 목적하는 바에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목표이다. 특정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것이냐 마느냐는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평가 및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그 기술의 기초가 된 과학적인 지식과는 별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런 기술의 도입이 가져오는 사회적인 영향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연구는 기술 도입의 문제를 둘러싼 정책결정의 중요한 판단 기준은 될 수 있어도 그런 연구에 시민들의 참여해야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과학과 기술을 동의어로 사용하거나 '과학기술'을 하나의 명사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 문제와 같이 가치판단에 의거한 정책결정의 '민주화'를 '과학기술의 민주화'로 지칭함으로써 심각한 개념적인 혼란을 자아내고 있다.

아무튼 과학 기술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주장이 과학적인 진술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이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일정한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하나의 관념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있는 사회과학자들의 학술용어 사용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는 현대문명이 빚어내고 있는 각가지의 폐해들로 인류는 점차 '위험사회'에 직면하고 있는 바, 이것은 과학 기술 정책이 이른바 엘리트 과학 기술 전문가들에게만 맡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과학 기술과 관련된 정책결정에 다양한 시민집단이 참여해야한다는 가치판단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로서는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로서 시민과의 합의에 도달하지 않은 채 과학자들만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과학자들 자신이 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특정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나 기술을 둘러싸고 그것을 적용하거나 도입할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정책결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것이 연구와 개발 그 자체에 시민이나 시민단체 등의 비전문가의 개입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중대한 저해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학문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연구와 개발은 전문가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서 자유롭게 창의력의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한 재정적인 지원이나 그 결과의 도입 등과 관련한 정책결정은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문제이기에 비전문가가 참여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효과적인 시민운동을 위한 이념으로 내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 기술의 연구와 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메시지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4. 과학 기술에 대한 통제: 인간중심론의 환상



'동양문화사' '서양문화사' 등의 문화사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종교 등과 함께 과학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는 생활양식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과학 기술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항목들이 모두 인간의 사고를 통해서 고안되고 또 인간의 행동으로 표현된 결과라는 의미에서 "인간이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든가 "인간이 문화를 창조해 나간다."는 표현을 우리는 스스름 없이 한다.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없이는 인간은 살 수 없다는 점에서도 인간과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문화는 인간에 의해서 가능했고, 또 인간이 없이는 문화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그의 문화 또는 문명의 주인이다."라는 식의 표현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바로 이런 사고가 확대되어 "인간은 문화, 또는 문명의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거침없이 하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마치 '패배주의자'나 '운명론자'로 몰아부친다.

이런 식으로 인간중심으로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인간중심론(anthropocentrism)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고 사기를 앙양시키는 데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는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사는 이런 점을 잘 들어내주고 있다. 과학 기술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학 기술 분야에서의 혁신을 설명하는 데에 그 혁신자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특정의 과학 기술적인 혁신을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상호 긴밀한 관련을 지으면서 하나의 기능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혁신의 경우 그 발명이나 발견의 어느 부분도 혁신자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부분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는 그 혁신자의 행동을 통해서 종합(synthesis)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특정의 혁신이 왜 그 시기에, 그 장소에서, 그런 형식으로 나타났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혁신자 개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사에서 나타난 무수히 많은 발명과 발견의 사례들이 한 사람 이상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거의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인간중심론적인 설명이 얼마나 무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사회학자 William F. Ogburn은 그의 저서 Social Change(New York: The Viking Press, 1922: 90-102)에서 인류의 과학기술사에 등장한 기념비적인 발명과 발견 중 두사람 이상에 의해서 독립적이고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사례 148 개의 목록을 싣고 있다.

촬스 다윈과 알프레드 월레스는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길을 통해서 생물의 진화론에 도달하였고, 그레이와 벨은 독립적으로 전화기를 발명하여 그것도 같은 해인 1876년의 같은 달 같은 날에 미국 특허국에 특허 신청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이 두가지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각기 혁신자 개인을 끌어들여서 우리는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대신에 이 각각의 혁신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이 어떤 식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 혁신자들은 그런 부분들에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의 지적 풍토, 과학기술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한 부분들간에 종합이 이루어질 여건이나 기회가 어떠했는지 등에 초점을 돌리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있는 설명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개인에 초점을 맞춘 인간중심론적인 설명으로는 진화론이나 전화라는 특정의 혁신이 그보다 100년 전 또는 200년 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 있는 어떤 특출한 천재적인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었는지를 설명해낼 길이 없다.

과학 기술은 문화의 한 부분이다. 과학 기술이 인간에 의해 실현되기는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나 문명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과학 기술을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이 말을 과학적인 진술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물론 때로는 과학 기술 정책이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방향으로 바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정책결정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인간이 과학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인간이 과학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론적인 해석에는 그런 정책결정이 인간의 의지, 또는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정책결정을 내릴 때에는 그와 관련된 무수히 많은 요인들 및 변수들간의 상호관련성 및 상호작용을 파악해야한다. 이때 고려되는 요인들이나 변수들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바깥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임의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만약 이를 무시한 채 결정자들의 (자유)의지데로 밀고 나간다면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령님의 의지'나 그의 독단에 의해서 통치되어온 북한의 경험은 '인간중심론적인 환상'(anthropocentric illusion)이 어떤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지의 실패 사례를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사회나 나라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는 시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결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간에 상호작용이 사회구성원들의 행동을 통해서 일어나는 과정(process)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 또는 변화도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비록 그것이 사회구성원 개인의 행동을 통해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 변화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개인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사회문화과정에 존재하는 요소들간의 상호작용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행위자 개인에 초점을 둔 인간중심론적인 해석은 행위자의 의지를 파악하려는 논리여서 결과만으로 원인을 설명하려는 식의 동어반복(tautology)일 뿐만 아니라, 현상의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는 하나의 환상(illusion)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목적은 설명과 예측에 있다. 그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나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에 의거해야 하고, 그 증거에 접근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 예술적인 설명과는 달리 과학은 변수들간의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따진다. 즉 연구 대상의 현상을 낳게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 논쟁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던 기술결정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새로운 기술사회학 이론들"(김환석)이라는 대목에 필자는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싶다. 기술사회학의 이론들이 바로 그런 시각에 입각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기술의 민주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잘 들어내주고 있는 셈이다.

기술결정론이 과연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일까? 김환석교수는 이 '기술결정론'이 "기술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며 이러한 기술의 논리와 속성이 사회변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고 보고 있다고 하며, 이것이 과거 사회학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고 했다. 과연 이런 주장이 '과거 사회학의 경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회학자가 "기술이 사회로부터 독립해서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서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기술의 속성을 결정하는 과정에 사회적 요인들이 깊게 개입한다는 기술사회학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나온 주장인 것 같지만, 감히 기술결정론을 그런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회학자 내지 사회과학자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사회과학자들을 포함하여 지성인들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용어를 대체로 싫어한다. 하물며 인간사회의 제현상이 기술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주장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여기에도 역시 인간중심론적인 환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그의 행동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사회과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바의 '기술결정론'이란 사회현상을 결정하는 요인들 중 기술이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것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도 역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기술결정론'이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회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거부하는 바의 '결정론'은 과학적인 방법론의 차원에서의 논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이때의 결정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제(premise)이고, 이데올로기로서의 '교조적인 결정론'(doctrinal determinism)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정작 과학적인 분석단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로서의 결정론은 현상을 분석해내기 위한 하나의 연구전략이나 관점(perspective)으로서의 '방법론적인 결정론'(methodological determinism)이다.

) 결정론을 '교조적 결정론'과 '방법론적 결정론' 두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카프란의 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기술결정론'이 적어도 '방법론적인 결정론'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지 않았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Kaplan, Abraham, The Conduct of Inquiry: Methodology for Behavioral Science, San Francisco: Chandler Publishing Co., pp.121-125 참조.) 이것은 마치 천문학자들이 별자리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망원경과 같은 연구용 도구이다. 즉 무엇이 다른 무엇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방법론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도구로서, 그 효율성은 그것이 현상의 이해에 어느 정도로 도움이 되는지에 달려있다. 마치 "A가 B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단언하는 '교조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변수들간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변수 A가 변했을 때, 그것이 B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방법론적인 결정론'은 그 자체가 변수들 간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려는 전략 또는 관점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술결정론'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아왔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결정론'이 아니라, 사회문화현상 중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변화가 다른 영역에 어떤 추가적인 변화를 가져오는지의 관점에서 현상을 파악하려는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서 "기술이 사회문화체계의 다른 영역을 결정한다."(이데올로기)는 법칙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체계의 작동방식 또는 운영방식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중 "기술이 다른 영역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관점(방법론)에서 파악해보자는 연구전략이다. 물론 이 기술결정론은 과학적인 분석도구 중 유일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도구 중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결정론'은 여전히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분석도구로 남아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5. 맺는말: 뒤르껭으로 돌아가자!



인간이 과학 기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고 표현된다는 의미에서 곧 행위자인 인간의 손에 또는 인간의 의지에 달렸다는 논리에서 나온 인간중심론적인 환상이다. 과학 기술은 사회문화체계라는 거대한 체계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조직, 종교, 교육, 군사, 생계유지 방식 등의 다른 영역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곧 우리가 관찰하는 바의 한 시기의 과학 기술이다.

이 논쟁은 현대의 과학 기술이 우리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출발하여 좁게는 과학 기술을, 넓게는 문명의 경로를 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방향으로 통제하려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위한 처방으로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제시되었고, 또 구체적으로는 "전문지식 위주의 편협했던 과학기술교육에 대한 반성으로서" 다양한 '과학기술과 사회(STS)' 프로그램들의 설치가 제안되었다. '과학기술시대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은 우리 인류를 '위험사회'로 빠져들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인류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교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인류의 지성에 여전히 뿌리깊이 남아 있다. 우리의 공식교육과정에 이른바 STS 과목을 도입하여 잘못된 과학 기술 교육을 바로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언듯 보아서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만, 이는 그렇지 않아도 너무 과다한 교과목수에 허덕이는 피교육자들에게 또 하나의 추가적인 짐을 지워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우선 교육이 사회문화체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그 체계 속에 있는 한 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교육은 사회문화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사회를 이끌고 나가고 있다는 생각은 역시 '인간중심론적인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민주화'나 '과학기술시대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은 모두 과학 기술 연구의 결과를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와 관련한 정책결정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지, 과학적인 연구의 지평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논쟁의 당사자인 두분의 주장은 모두 다 옳았다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즉 김환석교수의 관심은 과학 기술 연구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환경파괴, 안전재난, 복지낙후" 등과 같은 과학 기술의 발달이 빚어낸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효과적인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로 제안된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오세정교수는 '(자연)과학 연구의 차원'에서 가치중립의 원칙을 고수한 채 과학자들은 비전문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으면서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종사하도록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자의 당연한 입장을 재천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이 두 가지의 차원을 혼돈한 나머지 과학적 연구의 가치중립성을 부인하고, '과학기술시대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빌미로 외부자가 과학자들의 연구작업에 개입한다면 이는 인류의 복지증진을 위한 국가적인 사업에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과학 기술 정책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과학 기술 연구의 결과는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어느 쪽으로든지 이용될 수가 있다. 그것이 어떤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해서 연구 자체에 제동을 건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나라에서 그런 연구를 해내어 위협을 가해왔을 때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파멸을 자초하는 셈이다.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활용하거나 도입하는 문제를 둘러싼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이 새로운 계획에 의해 영향을 받을 시민의 견해도 고려되어야할 것이고, 재정, 정치, 기술, 군사, 사회조직 등 사회문화체계 내의 다양한 영역들과의 상호관련성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할 것임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 글을 마치면서 필자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이 던져준 귀중한 고전적인 교훈이 100년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음에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낀다. 즉 뒤르껭은 그의 저서 セ사회학적 방법의 제법칙ソ(1895)의 제2판을 1901년에 내면서 추가한 '제2판 서문'에서 '사회적인 사실들의 객관적인 실재'(the objective reality of social facts)가 사회학의 원리임은 천명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사회현상은 개인 바깥에'(external to individuals)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 . . . 인간중심적인 편견(anthjropocentric bias)의 잔재는 수많이 남아있고, 다른데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것들이 과학의 길을 막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 . . . 그가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환상인 이런 전지전능(omnipotence)은 항시 그에게 약점이었다는 점, 그리고 사물(things)이 하나의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또한 사물로부터 이 성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데에 몸을 내맡길 때에 비로소, 그 사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은 사실상 시작되었다는 점 등을 여러번 되풀이된 경험이 인간에게 가르쳐주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다른 과학에서 거부되었지만, 이런 한탄할만한 편견이 사회학에서만은 완강하게 고집되고 있다. 이 편견으로부터 우리들의 과학을 해방시키는 것만큼 더 급한 것이 없고, 이것은 우리들의 노력의 주목적이다. ) Durkheim, Emile, The Rules of Sociological Method, (trans. by S.A.Solovay & J.H.Mueller), N.Y.: The Free Press.(1938), p. lviii. 사실 '과학기술의 민주화'와 같은 이념은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호소력이 있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강력한 통합 메카니즘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연구의 차원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한갖 '인간중심론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 논쟁에서도 우리는 '인간중심론적인 편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것이 과학의 길을 막고 있다는 뒤르껭의 외침이 아직도 우리의 사회과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기술의 민주화'는 과학 기술과 관련한 정책결정과정에서는 정당성이 인정되지만, 그것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는 오히려 저해적인 요소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싶다.


  • 인문학도 () IP :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문웅교수님은 옛날 인류학이 기술결정론에 머물던 시절 레슬리 화이트의 이론에 감명을 받으신 분입니다. 요즘 과학기술인류학의 관점은 이문웅교수의 설명과 전혀 다릅니다. 옛날 분이라서 최근의 흐름은 공부를 안하신 것 같애요. 하긴 그게 서울대 원로 교수님들의 한계이기도 하지...^^

  • 과학도 () IP :

      사회,인문학쪽은 "최신이론"이라고해서 더 낫지는 않죠.. ^^

  • 인문학도 () IP :

      하하, 과학도님은 사회/인문학 쪽에 대단한 편견을 갖고 계시는군요. 직접 들어와서 공부를 해보면, 이곳도 자연과학과 그리 다르지는 않습니다. 잘 모르면 신비화하고, 그러면 편견이나 공포를 갖게 되는 것 같애요. 사실 저도 좀 그랬는데... 아무튼 사람이 하는 학문이란 것은 어디나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저의 경험으로 받은 느낌입니다.

  • 인문학도 () IP :

      그리고 이문웅교수님에 대한 평가는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생들에게 한번 물러보세요. 뭐라 그러나...

  • 구성주의 () IP :

      대충 읽다가 결론을 보았는데,, 인류학자로써 뒤르켐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군요. 뒤르켐은 구성주의의 원조이기도 하지만 실증주의자이지요. 신과 종교를 실증주의적 inquiry의 대상을 삼았지요. 그리고 개인의 역할을 배제하는 철저한 구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구성주의는  보다 다양합니다. agency와 structure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 구성주의 () IP :

      사회학의 선구자 콩트가 신은 실증주이적 연구의 대상이 안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뒤르켐은 신은 과학적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바로 사회 그자체이면 종교는 과학의 어머니라고 규정했지요

  • 구성주의 () IP :

      그러나 그는 결코 과학을 포기하지 않지요. 그는 방법적으로 콩트를 계승합니다. 그가 자살을 연구하는 방법은 실증주의적 방법 즉 통계학등등인데 확실성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 구성주의 () IP :

      즉 뒤르켐은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전통과학을 거부를 하면서 연구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전통과학을 고수합니다. 이를 계승한 STS program이 바로 strong program입니다

  • 구성주의 () IP :

      단 strong pragram은 뒤르켐의 실증주의적 방법을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 구성주의 () IP :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객관성의 추구(정치성의 배제)는 사회학이 사회과학으로 불리게 되는 원인입니다. 소위 인터뷰와 같은 정성적인 사회학방법도 시카고 대학에서 처음 만들어 졌을때.. 정량적 방법의 문제점을 개선하기위해 만들어 졌지만 ..오히려 객관성을 보다 더 추구하고자 만들어 진 것입니다.

  • 구성주의 () IP :

      결국 뒤르켐이 주장하는 것은 depolitization of inquiry 그리고 value-neutrality of inquiry인데요..이는 스토롱 프로그램이 어느정도 공유하는 것이고 (이것이 제가 이전에 스토롱프로그램이 과학적이란 평가의 이유) 스토롱 프로그램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이문웅 교수도 뒤르켐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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