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에 얽힌 에피소드

글쓴이
cantab
등록일
2004-12-0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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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원쉐[金文學]라는 간도출신 조선족 학자의 전공은 비교문화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한국에서도 살고 중국에서도 연구하다가 지금은 일본 히로시마 대학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세 나라의 문화와 습속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글을 많이 써 왔다. 그 저술들이 모여서 [비교문화 삼국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등의 책이 되었는데 개중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몇 개 뽑아 본다.


#1.

태평양전쟁 때, 만주에서 숙영중이던 어떤 관동군 병사가 보초를 서다가 계란이 되게 먹고 싶었댄다. 그러나 초소에 계란 따위가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본영으로 돌아갔다간 근무지 이탈로 죽도록 맞든지 아니면 심지어 군기위반이라고 즉결처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배고픈 이 친구가 꾀를 내어 아예 한 마장쯤 떨어진 중국인 마을로 내뺐다. 보기에 제일 그럴듯한 집 대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쾅쾅쾅쾅.

[쉐야?(언놈이여?)]

마을 촌장은 웬놈이 야심한 밤에 문을 두들기나 하며 나왔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웬 각반한 일본군이 총검을 하나 꼬나매고 떡하니 서 있으니까 말이지. 마을 사람들 오밤중에 난리 났다. 저시키 혹시 요새 그 사람 잡아간다는 하얼빈 부대 그놈 아이가?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 병사 양반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니 자기는 중국어를 잘 못하는 것이다. (당시에 관동군에는 아예 니하오마? 말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 놈들도 많았다) 하지만 워낙 잔머리 잘 돌아가는 친구고 중국 와서 주워들은 글발은 있는지라, 땅바닥에 이렇게 썼다. (일본도 한자 문화권이긴 하다)

[아욕식대란다수(我欲食大卵多數)] - 큰 계란 많이 먹고싶소.

완벽한 중국어는 아니지만 대충 뜻은 통했다. 그런데 이 촌장 할배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리고는 지필묵을 청하더니 이렇게 썼다.

[몰유대란(沒有大卵)] - 없어 그딴거!

이 병사, 뭔가 이상하다 싶다. 저기 닭장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닭은 다 뭔데 싶은데 이 촌장 할배 얼굴색이 금방 숨넘어갈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다. 혹시 내가 너무 많이 요구했나 싶은 이 병졸은 붓을 들어 다시 이렇게 썼다.

[소란소수(小卵少數)] - 작은계란 조금만 내놔.

근데 마을 사람들 이걸 보니까 더 난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이건 병졸이건 전부 우왕좌왕하는 상황. 더 소란이 커졌다간 부대에서 탈영한 게 들통나게 생겼다. 그때서야 저 너머에서 글공부깨나 한 걸로 보이는 인텔리 선생 하나가 끄적끄적 걸어 오더니 일본어를 한다.

[병사, 당신 요구가 뭐요?]
[아 이제 말 통하는 사람 왔네. 아니 이 동네는 계란도 없슈?]

이 선생, 땅바닥과 지필묵을 번갈아 보더니 한 마디 한다.

[병사 양반, 중국말로 란(卵)은 남자의 XX란 뜻으로 말한다오.]

마을 사람들이 난리날 법 했지. 가뜩이나 일본군이 쿠즈[鬼子]라 욕을 먹을 정도로 여기저기 만행을 일삼으며 천둥 벌거숭이로 온 중국을 뒤집고 다니는데, 오밤중에 웬놈이 총창을 하나 덜렁 들고 나타나 마을 남자들 죄다 고자로 만들고 그걸 잘라 먹겠다니.


#2.

일본 종합상사 직원 하나가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 체류기간이 좀 길어지면서 고국에 편지나 엽서를 보내려 하던 차에 (일본 애들 특징이다. 여행지에서 항상 엽서를 보낸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두고 [경험의 공유], 즉 일본인들의 떼거리 습속의 연장선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마침 객실에 편지지가 없어서 종업원을 불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종업원에게 영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어는 더더욱 통할 리 만무하다. 지배인을 부를깝쇼 하다가 귀찮아서 메모지에다 편지라고 한자로 썼다. 그런데 어째 이 종업원 표정이 야릇해진다. 어쨌든 종업원은 어디론가 갔다 오더니 뭔가를 불쑥 내민다.

그것은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였다.

그런데 일본 샐러리맨이 중국 가면 이런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단다. 그러니까 일본은 편지를 테가미[手紙]라고 하는데, 이게 중국에서는 화장실용 휴지를 일컫는 말.


#3.

이번에는 일본 기업인들이 떼거지로 북경에 갔다. 특급 호텔 - 반점이라고 한다 - 에 숙박하고 낮엔 스케줄대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개중에 한 방문객이 엉뚱한 것을 기억해냈다. 낮에 움직이다가 이용한 중국의 공중화장실은 유료로 되어 있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혹시 이 호텔 화장실도 유료인가 싶어 이 양반, 호텔 종업원더러 필담을 시도했다.

[변소, 유료, 무료?]

그러자 이 종업원은 한참 생각하더니 메모지에 이렇게 썼다.

[유료. 비상이 많음.(有料, 非常多)]

그러자 이 임원은 생각하기를.

[또 동전 잔뜩 바꿔놔야겠군.]

그런데 좀 있다 이 일본 기업단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누가 찾아와 노크를 했다. 일본어 통역을 하는 중국인이이었다.

[종업원에게 말해 준 이야기를 호텔 지배인이 듣고 당신네들과 비즈니스를 할 생각인데,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당신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소리에 이 임원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무슨 프로젝트요?]
[아까 비료에 대해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엥?]

일본인이 아까 종업원이란 작자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니 이 통역 포복절도하다 못해 겔겔거리며 숨넘어간다. 해설인즉슨, 중국어에서 유료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재료가 있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이 종업원과 지배인은

[호텔 변소에서 생산되는 비료(인분)가 있는가? 있다면 당신네들의 분뇨를 우리가 독점으로 수급하고 싶은데.]

라고 해석해버린 것이었다.


#4.

한 일본인이 중국의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았다. 그게 서예 액자였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금옥만당(金玉滿當)] - 집에 돈과 재물이 꽉 꽉 차도록 번성하길...

그런데 이 일본사람 한동안 열받아서 연락을 뚝 끊었댄다.

이 사람이 해석한 뜻은

[니 XX 방구석 다 채우도록 굵다.] 일본어로 금옥은 남자 쌍방울이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 한자만 알면 뜻이 통하고 비즈니스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럽언어가 공통적으로 수천단어를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니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만 알면 유럽 어디를 가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된다는 식의 궤변이죠.

문제하나 내드리겠습니다.

NIHIL SINE MAGNO LABORE VITA MORTALIBVS DAT.

라틴어 한구절입니다.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여기 있는 라틴어 단어들은 SINE 하나 빼고는 전부 오늘날 영어단어에 비슷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힌트로 SINE는 영어의 without에 해당합니다. 한자사용을 주장하는 논리 그대로라면 토익 800점을 득점요령 부리지 않고 넘을 영어실력이면 이정도 라틴어 어구는 해석이 가능해야합니다.

동아시아 3국이 한자를 오랜세월 써 왔지만 같은 글자라도 그 뜻이 다른게 수없이 많고 용법조차 다른게 부지기순데 고작 한 3~4천 글자 안다고 지나 및 그 떨거지 국가들과 교역하는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같은 지나 안에서도 북경어와 광동어는 서로다른 외국어로 취급될 정도로 문법체계마저 다르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싱가폴까지 가게되면 이제는 발음이 완전히 다를 정도죠. 물론 지나본토에서 쓰는 간자체는 우리가 배우려는 한자와는 생긴것도 달라서 도무지 짐작조차 안되는 글자들 투성이이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있으면 한자를 쓰자고 주장해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하긴 이런 어르신들 중에는 유전자 분석결과를 근거로 우리민족과 북방민족이 친척관계라고 말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야만인들과 같은 종족이냐고 하는 것이죠. 아직도 우리는 소중화라고 자부하던 17세기에 살고계신 것은 아닐런지...

  • 준형 ()

      재미있지만 뜻있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킥킥 대고 있습니다. ㅋㅋㅋ

  • REVOLUTION ()

      TV에서 보니 한민족은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이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즉 단일민족이 아니란거죠. 또 어디서 본건데 한국은 1만년에 걸쳐서 35개 민족이 융합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왜 굳이 한자를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 제가 쓰는 말중 상당수가 한자를 한글로 쓴 것이지만요.

    그런데 또 아예 점진적으로 본래 순수 우리말을 찾아나섰으면 좋겠습니다.

    Dragon을 의미하는 용이라는 말은 실상 龍 이지요. 그런데 원래 용龍이라는 단어의 원래 순수 우리말은 "미르"라 하더군요.

    비단 이것뿐만 아니라 본래 존재했다가 잊혀져버린 순수 우리말이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국문학자분들께서 이런 것들 좀 되살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뭘 봐? ()

      `살다가 죽을 때까지 많이 일하는 것 빼곤 없다' 인가요? 느낌은 그런데...

  • 구두운 ()

      중국어 제2외국어로 배웠는데요. 간체자라고 하는 걸 쓰고, 의외로 중국 일상 생활용어나 현대어로써 사용되는 중국 간체자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나 한국사람이 현대 중국어 배우기가 쉬운 건 사실이지요. 사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자는 중국의 고대문자입니다. 그건 마지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하고 옛날에 쓰던 고어하고 틀린 것이랑 같죠.

  • 구두운 ()

      오히려 한국사람이 중국어를 제대로 익히는 첫 난관은 바로 4성조이죠. 같은 소리가 네 종류의 억양으로 발음되는 건데요. 마 라는 단어가
    4개의 억양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베트남어도 이런 게 있다고 하더군요..

    음,,근데 현대에 쓰는 중국단어는 다시 다 배워야 합니다. 중국 고대 한자 아는 것하고는 상관없지만, 한자에 친숙하면 서구인들보다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현대 중국어를 배우기 쉬운 건 사실이죠.

  • 구두운 ()

      머 중국어도 잘 할려면 단어익히기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중국은 외국이고, 중국어는 외국어이니깐요. 그나저나 한글과 한글단어에 대해서 좀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더라구요. 은근슬쩍, 일본기원 단어뿐만 아니라 영어기원 단어도 엄청나게 많습니다.............원래는 중국한자에서 기원한 단어인데 지금 고유언어인줄 착각하는 단어들도 많구요....김치나, 절(불교사찰)도 사실 한자에서 기원한 단어입니다..우리 고유언어 아니에요....

  • 구두운 ()

      사실 산(백두산 등등)같은 단어도 뫼라는 단어가 더 이쁜데, 굳히 산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더라구요...........

  • REVOLUTION ()

      구두운님의 말씀처럼 지금 쓰는 단어중 상당수가 고유언어, 순수 우리말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순수 우리말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용龍보다는 "미르"가 더 좋습니다.

  • 김진홍 ()

      좋은 글이네요:) 제 블로그에 게시해도 되겠죠?

  • 주제 ()

      근데 위 글의 주장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위에서 의미가 다르게 쓰이는 몇 글자를 가지고 한자를 배워도 서로 의사소통하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럼 저 글자를 제외한 나머지 문장에 쓰인 한자들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我欲食大卵多數라는 첫문장에서 의미차이로 문제가 된 글자는 卵 하나뿐이지 않은지요..나머지 한자는 전부다 의미가 통한다는것으로 본다면 윗글의 주장은 오히려 모순이 됩니다. 확실히 두번째는 의미가 다르게 쓰이는 케이스이죠.. 하지만 세번째 에피소드의 경우 관점은 料라는 글자 하나의 차이만으로 생긴 에피소드라는걸 생각해볼 때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네요 특히 非常 多의 경우는 일본어나 중국어나 다 의미가 통합니다. 물론 한자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이나 서양인들에게는 애초에 이런 의미해석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네번째 에피소드도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라틴어와 비교를 했는데... 라틴어는 주어나 시제 등 여러 조건에 따라 어미가 복잡하게 변하는 굴절어입니다. 즉 철자의 변화에 대해서도 별도로 공부해야하죠.. 하지만 한자는 아예 글자 자체가 하나의 어휘에 해당하는 고립어입니다. 표음문자가 아닌 표의문자로 되어있기 때문에 글자 자체가 라틴어처럼 어미변화를 할 일도 없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들보다도 서문에 따른 대화가 더 용이할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간체자가 쓰이지만 중국 내에서도 간체자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들고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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